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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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0. 12. 3. 08:16
정세랑* 창비할머니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었고 일을 할 수 있는 몸인 걸 자랑스러워했다. 뼈가 약한 다른 할머니들을 안쓰러워 하기도 했다. 할머니가 자신의 몸에 가지는 그 자부심이 너무 강해서, 나는 할머니가 잘 때 종종 앓는 소리를 낸다는 걸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고통을 모른 척 했고, 가난을 모른 척 했다. 한 끗이 모자랐다. 다른 사람들의 평도 그랬고 나 자신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힘도 기술도 빠지지 않았는데 그 한 끗은 대체 뭐였을까? 그리고 그 구멍에서 신경질이 솟구쳤다.그냥 신경질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한 번도 신경질을 내본 적이 없었던 거다. 제대로 신경질을 내본 적이. (중략) 내가 먼저 구기고 숨기고 모른척 했던 신경질이었다. 화를 낸 적은 있었어도 신경질을 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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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옥상에서 만나요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0. 11. 26. 14:52
정세랑* 창비여자는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바퀴벌레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일부러 야근을 했고, 일찍 퇴근한 날은 까페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중략) 큰 돈을 들인 집에 들어가기 싫다니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너무 화가 났다. 바퀴벌레를 나몰라라 하는 남자에게도 화가 났다. 그런 상태에서 자잘한 결혼 준비를 혼자서 맡아 하다가, 결혼식 이틀 전에 터지고 말았다. "지난 한달 같은 날들이 이어지느니 여기서 멈추는 게 낫겠어"남자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았고 썩은 싱크대를 맨손으로 뜯어내며 사과했다. 여자는 잠을 깊게 자지 못해 상한 얼굴로 드레스를 입었다. (★)여러 에피소드 중 위의 에피소드가 생각났던 것은 나와 동일한 상황이라기 보다는 남편의 대처 방식이 그 즈음에 매우 비슷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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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이만큼 가까이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0. 11. 19. 11:03
정세랑* 창비 p14.사람들은 커다란 카메라를 보면 잠시 긴장하지만, 대충 내려놓고 괴어 놓으면 이내 잊어버린다. 동영상을 찍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자연스럽게 웃고 이야기 한다. p26."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랑할 필요는 없어. 하나도 안 사랑해도 돼"수미한테 그렇게 말한 건 민웅이었다. 마치 "그 가수 앨범의 모든 트랙을 들을 필요는 없어, 좋아하는 노래만 들어" 정도의 말을 하듯 가볍게 말했다. 민웅이가 아니면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 거다. 그런 말을, 사람을 구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민웅이었다. p91.그렇구나, 자칫 잘못하면 인생이란 거 아주 쉽게 비루해지는구나. 아니, 웬만해서는 비루함을 피할 수 없구나. p93.인정하면 많은 것들이 편안해진다고 하던데, 정말이다. p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