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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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목소리를 드릴게요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3. 14. 20:36
정세랑* 아작미싱 핑거와 점피걸의 대모험그렇지만 가끔 연고를 매니큐어로 바꿔치기해둘 때가 있어. 아주 자주는 아니지만 내가 비겁하게 이곳을 떠나고 싶어질 때에. 11분의 1울음을 그치고 이 이메일을 씁니다. 혜정씨, 보고 싶을 거예요. 저는 원래 사람을 안 좋아하는데, 열한 명 중의 한 명 정도만 좋아하는데, 혜정씨는 그 한 명 쪽이에요. 혜정씨를 좋아해요. 좋아했어요. 함께 점심을 먹을 때가 하루 중 제일 나은 시간이었습니다. 리셋인류는 더 이상 인류를 위해 다른 종을 굴절시키지 않는다. 모조 지구 혁명기천사는 날개가 없을 때부터 천사였고, 천사가 내게 주는 안도감은 우주를 샅샅이 뒤져도 다른 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종류이리라 확신한다. 리틀 베이비블루 필모든 시험이 오픈 북이 되었다. 시험은 지식 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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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0. 12. 3. 08:16
정세랑* 창비할머니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었고 일을 할 수 있는 몸인 걸 자랑스러워했다. 뼈가 약한 다른 할머니들을 안쓰러워 하기도 했다. 할머니가 자신의 몸에 가지는 그 자부심이 너무 강해서, 나는 할머니가 잘 때 종종 앓는 소리를 낸다는 걸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고통을 모른 척 했고, 가난을 모른 척 했다. 한 끗이 모자랐다. 다른 사람들의 평도 그랬고 나 자신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힘도 기술도 빠지지 않았는데 그 한 끗은 대체 뭐였을까? 그리고 그 구멍에서 신경질이 솟구쳤다.그냥 신경질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한 번도 신경질을 내본 적이 없었던 거다. 제대로 신경질을 내본 적이. (중략) 내가 먼저 구기고 숨기고 모른척 했던 신경질이었다. 화를 낸 적은 있었어도 신경질을 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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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옥상에서 만나요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0. 11. 26. 14:52
정세랑* 창비여자는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바퀴벌레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일부러 야근을 했고, 일찍 퇴근한 날은 까페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중략) 큰 돈을 들인 집에 들어가기 싫다니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너무 화가 났다. 바퀴벌레를 나몰라라 하는 남자에게도 화가 났다. 그런 상태에서 자잘한 결혼 준비를 혼자서 맡아 하다가, 결혼식 이틀 전에 터지고 말았다. "지난 한달 같은 날들이 이어지느니 여기서 멈추는 게 낫겠어"남자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았고 썩은 싱크대를 맨손으로 뜯어내며 사과했다. 여자는 잠을 깊게 자지 못해 상한 얼굴로 드레스를 입었다. (★)여러 에피소드 중 위의 에피소드가 생각났던 것은 나와 동일한 상황이라기 보다는 남편의 대처 방식이 그 즈음에 매우 비슷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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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이만큼 가까이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0. 11. 19. 11:03
정세랑* 창비 p14.사람들은 커다란 카메라를 보면 잠시 긴장하지만, 대충 내려놓고 괴어 놓으면 이내 잊어버린다. 동영상을 찍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자연스럽게 웃고 이야기 한다. p26."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랑할 필요는 없어. 하나도 안 사랑해도 돼"수미한테 그렇게 말한 건 민웅이었다. 마치 "그 가수 앨범의 모든 트랙을 들을 필요는 없어, 좋아하는 노래만 들어" 정도의 말을 하듯 가볍게 말했다. 민웅이가 아니면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 거다. 그런 말을, 사람을 구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민웅이었다. p91.그렇구나, 자칫 잘못하면 인생이란 거 아주 쉽게 비루해지는구나. 아니, 웬만해서는 비루함을 피할 수 없구나. p93.인정하면 많은 것들이 편안해진다고 하던데, 정말이다.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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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섬의 애슐리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0. 11. 19. 10:43
정세랑* 미메시스p20."너도 가지 않을래?"아빠가 물어준 건 기뻤지만, 아빠도 내 대답을 알고 물었을 것이다. 내가 없어도 그 가족은 완결되고, 본토에는 내 자리가 있을 리 없었다. 거리감을 유지해야만 했다. 서로를 해치지 않는 거리감을. p49.그러니까 나는 그 모든 혼란을 통제하는 리더, 섬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남자의 어깨 위에서 춤을 추게 된 것이다. 그제야 진정으로 가 된 기분이었다. 다른 355명의 애슐리는 내게 이름을 빼꼈다. 뒤늦게 섬에 받아들여진 셈이었고, 서러움이 잊힐 정도로 좋았다. p54.재난이란 것의 특성은 결국, 재난에 휘말린 사람의 개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이 얼마나 선량하고, 얼마나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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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재인.재욱.재훈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0. 11. 17. 22:43
정세랑* 은행나무(★)뭔가 시리즈 형태로 이 작품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인의 능력을 제외하면 나머지 아니, 아니 형제의 능력은 제한적인 것이 아닌가 싶었다. 재욱의 불량을 보는 눈과 레이저 포인터의 연결 속에 물건은 다른 이의 손에 전달되어 더이상의 스토리는 재회가 아니면 안되겠지만 말이다. (스포인건가?) 또한 재훈의 열쇠도 마스터 키의 개념이 아니라면 결국 또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음 에피소드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소설을 통해서 현실 불가능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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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보건교사 안은영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0. 11. 11. 03:14
정세랑* 민음사p95.이 숨김 없는 말에 잠시 망설여졌지만, 할아버지의 명언이 떠오르자 곧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놀아 본 놈이 큰 사고를 안친다고 하셨다. p233."있잖아, 다음 선거에는 너희들에게도 선거권이 있어"대흥의 설명을,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 이 아이들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나을 거야. 그러니까 그 바보 같은 교과서를 막길 잘 했어. (★)읽고나서 유쾌한 기분.추신1. 넷플릭스 영화를 봤다. 이경미 감독을 좋아하긴 하지만, 뭔가 각본에 정세랑 작가도 참여는 했다고 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