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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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 겨울을 지나가다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12. 16. 10:00
조해진 문장을 얹으며, 미래에 꺼내 쓸 빛을 품은 소설김혼비 / 에세이스트p5. 아끼는 단어들을 차곡차곡 모아두는 마음속 사전에서 오랜만에 '애일(愛日)'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사랑해야 할 햇빛'이라는 멋진 비유로 '겨울의 낮'을 뜻하는 이 단어는 '매일을 아낀다'로 해석되면 '부모를 보살필 수 있는 날이 적은 것이 안타까워 하루라도 더 정성껏 모시려고 노력함'을 뜻하기도 한다. 1부. 동지 / 冬至 p9.시간이 담긴 그릇.......잠든 엄마를 내려다보며 나는 생각했다.사람의 몸은 시간이 담긴 그릇 같다고.p14.한사람의 부재로 쌓여가는 마음이 집이 된다면 그 집의 내부는 너무도 많은 방과 복잡한 복도와 수많은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리라. 수납공간마다 물건들이 가득하고 물건들 사이 거울은 폐허의 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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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빛의 호위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6. 7. 10:00
조해진 빛의 호위p25.폐허가 되어가는 동네의 외진 방에서 권은이 감당해야 하는 허기와 추위를 나는 해결해 줄 수 없었다.안방 장롱에서 우연히 후지사의 필름 카메라를 발견했을 때 일말의 주저도 없이 그걸 품에 안고 무작정 권은의 방으로 달려갔던 건, 내 눈에는 그 수입 카메라가 중고품으로 팔 수 있는 돈뭉치로 보였기 때문이었다.p32.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장롱 뒤나 책상 서랍 속, 아니면 빈 명 속처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얄팍하게 접혀있던 빛 무더기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일제히 퍼져나와 피사체를 감싸주는 그 짧은 순간에 대해서라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다른 세계를 잠시 다녀오는 것 같은 그 황홀함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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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단순한 진심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1. 5. 17. 20:44
조해진 p8. 탯줄은 있었을까. 가끔 그런 의문이 들 때면 반사적으로 두 손을 배에 얹고 가만히 배꼽 근처를 더듬어 보곤 한다. 그러나 내 배꼽은 생모의 흔적일 뿐, 그녀의 손 끝 하나 재현할 수 없다. 무력한 증거, 고유성 없는 기호, 닫힌 통로... p17. 이름은 집이니까요. p32. 40년만에 드디어 엄마를 찾았는데 보러가지 않았어요. 내가 찾던 사람은 생물학적인 엄마가 아니라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감정적인 차원의 엄마였나봐요. 아니, 어쩌면 나는 그 이상의 엄마를 만나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아이를 버린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비는 엄마 말이에요. p115. 몽펠리에로 오라는 리사의 말투는 무심했지만, 내게는 한량없는 안도감을 주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