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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빛의 호위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6. 7. 10:00
조해진
빛의 호위
p25.
폐허가 되어가는 동네의 외진 방에서 권은이 감당해야 하는 허기와 추위를 나는 해결해 줄 수 없었다.안방 장롱에서 우연히 후지사의 필름 카메라를 발견했을 때 일말의 주저도 없이 그걸 품에 안고 무작정 권은의 방으로 달려갔던 건, 내 눈에는 그 수입 카메라가 중고품으로 팔 수 있는 돈뭉치로 보였기 때문이었다.p32.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장롱 뒤나 책상 서랍 속, 아니면 빈 명 속처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얄팍하게 접혀있던 빛 무더기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일제히 퍼져나와 피사체를 감싸주는 그 짧은 순간에 대해서라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다른 세계를 잠시 다녀오는 것 같은 그 황홀함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권은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악기상점의 쇼윈도우에 반사되는 햇빛이 오직 그녀만을 비추고 있었다.번역의 시작
p41.
기차 소리가 깃들면 그 평범한 뒷마당이 어느 국경도시의 환승역처럼 느껴졌다. 내가 갈아탈 기차가 어디로 갈지는 안내판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라는 한 인간이 덧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생소한 가능성, 기차의 목적지가 환기하는 그 가능성은 나를 두렵게도 했지만 매혹하기도 했다.사물과의 작별
p71.
특별한 사람과 관련된 일련의 기억은 연극과도 같아서 기억 속 장면들은 실제와는 다소 차이가 나는 인위적인 무대에서 연출될 때가 많다. 기억의 주체는 감정적으로 과잉되기 마련이고, 때로는 사소해보이는 소품 하나가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을 불러오기도 한다.동쪽 伯의 숲
p90
오래전, 한나에게는 스스로 세운 세개의 규칙이 있었다. 비밀을 나누는 친구를 사귀지 않을 것, 미래를 공유할 애인을 만들지 않을 것, 마지막으로 죄의식을 고백할 수 있는 신을 믿지 않을 것. 이 규칙들만 지켜나간다면 인생에서 견디기 힘든 배신감이나 일상을 흔들어놓는 절망감은 피해갈 수 있을 거라고 한나는 믿었다.p113.
용서할 수 없었던 그 무력한 시절은 어느날엔 단 하나의 진실처럼, 또 다른 날엔 악의적인 거짓말처럼 끊임없이 그에게 되돌아왔을 것이다.산책자의 행복
p142.
저는 두려웠습니다. 답장이 오지 않는데도 수년에 걸쳐 라오슈에게 꾸준히 이메일을 보낸 건, 돌이켜보니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또하나의 부재를 감당하게 될까봐, 온몸을 내던져 부딪힐 장벽도 없이 그 어쩔 수 없는 부재에 잠식될까봐 저는 무서웠습니다. 그러니 저는 라오슈가 아니라 제게 닥칠지 모를 가상의 고통을 걱정한 것입니다.
저는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고,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다예요, 라오슈.잘 가, 언니
p163.
그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늙은 남자의 울음과 젊은 여자의 중얼거림이 섞이고 교차하는 병실 안은, 그러나 시끄럽지 않고 적막했습니다.p167.
비해기가 무사히 착륙하고 끊어질 듯 가쁘던 숨이 돌아오고 나서야 저는 알았습니다. 제가 작은 죽음을 경험했다는 것을요.p168.
그 동네에서 살던 마지막 해의 어느 겨울밤, 그때도 우리는 어머니의 스웨터로 하나의 실타래를 완성해갑니다. 밤이 깊어도 세계의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의 행렬은 끊이지 않고, 저는 대체 어떤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는 걸까 궁금하기만 합니다. 그사이 스웨터는 작아지고 실타래는 커져갑니다. 자꾸만 조음이 밀려와 눈이 감기지만, 잠결에도 실을 잡아 당기는 힘이 느껴질 때마다 저는 안도하곤 합니다. 당신의 손에 딸려가는 실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저는 언제까지고 안전할 것만 같습니다. 그 실만 잘 따라간다면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그 목적지가 나올 거라는 믿음은 그렇게 점점 둥그러지고 커져갑니다. 그러나...시간의 거절
p195.
비가 온다 해도 피하지 않고 젖은 몸으로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그곳에도 있을 터였다.문주
p213.
- 있잖아요, 왜, 사진의 접힌 부분 같은 거, 펴본 뒤에야 중요한 단서였다는 걸 알게 되는... 내일 그분을 만나는 게 그런 과정일수도 있을 거예요.작은 사람들의 노래
p248.
편지의 내용보다 엘리의 후원자들께, 라는 표현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 균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지금껏 엘리의 사랑이 다수의 부모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어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엘리는 다른 후원자들에게도 아빠 혹은 엄마라고 부르며 건강과 평화를 빌었을까. 대학에 가면 한국어를 배우겠다든지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고도 썼을 것인가. 똑같은 디자인의 편지지를 쌓아두고, 마치 귀찮은 숙제를 하듯 기계적으로 편지들을 썼을 앨리의 뒷모습을 상상하자 균은 호되게 버림받은 사람처럼 외로워졌다.(★)
지난번 조해진님의 작품이 인상적이어서 동네책방에서 이 책을 보고 읽어봐야 겠단 생각을 했다. 신기하게도 책의 표지의 느낌과 같이 소설을 읽어나가는 내내 이상한 무기력함과 알 수 없는 답답함, 그 속의 찰나의 빛의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