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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5. 8. 20:21
김범석
사람들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환자가 의사를 먹여살리는 셈이고, 때로는 환자가 의사를 치료하기도 한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늘 두렵다. 한꺼번에 폭풍처럼 할 말만 쏟아내서는 안 된다. 실타래를 풀듯이 환자와 보호자가 의사의 설명을 이해했는지 확인하면서,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것은 아닌지 살핀 뒤에 그 다음 이야기를 어디까지 할 지 결정하고 이야기를 해나가야 한다.
암에 걸리는 것은 허허벌판을 지나다 예고 없이 쏟아 붓는 지독한 폭우를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우산도 없고 피할 곳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고스란히 쏟아지는 비를 맞는 것뿐이다. 그러나 가만히 서 있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중략) 피를 나눈 사이라고 해도 상처를 쌓이면 곪고 후회는 깊고 아쉬움은 길다. 아니, 아마도 피를 나눈 사이라서 더 그럴 것이다. 가족이 가족이기 위해서는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버티는 환자들을 지켜다 보면 '죽을 용기'라는 말에 동의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지켜본 바로 용기라는 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가 아니라 '결국 죽을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날들을 버텨내고 살아내겠다'는 의지에 가까운, 살아내는 용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긍정을 늘 조건으로 삼는다. (중략)
다만 결과에 대한 긍정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과정과 태도에 대한 긍정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내가 잘 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그 자체가 긍정이어야 한다.이제야, 어느 정도 살아보니 세상에는 정말 겪어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안다. 이제는 진료하면서 환자에게 '당신을 이해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세상에는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누군가 돌볼 때 어느 정도는 이기적이어야 이타적이 될 수 있다. 결국 이기심과 이타심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중략)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을 때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과 여력이 생긴다.
죽은 이는 말이 없다. (중략) 존엄한 죽음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마지막 순간에 의사로서 진정 환자를 위하는 일은 무엇인가.
(★)
엄마를 보내는 과정에서 담당의에게 실망한 부분이 있다. 안 좋은 소식을 제대로 전해줘야 할 직업 중 하나가 의사가 아닐까 싶은데... 결국은 호스피스로 이관하는 것조차 명확하게 하지 않는 의사를 대신해서 우리 가족이 서류 준비를 먼저 했어야 했다.
한편으로는 의사도 직장인 혹은 자영업자이겠지. 회사에서 만나는 우리 동료들이 모두 일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상냥하고 세심한 것도 아니다. 옷가게나 음식점 사장님이 모두 친절하고 솜씨가 좋거나 좋은 물건을 파는 것도 아니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은 좀 달랐으면 한다. 이익을 챙기는 것도 좋으니, 환자도 좀 잘 챙겨줬음 한다는 것. 아플 때 사람은 더 쉽게 상처를 받고, 그런 아픈 사람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 역시 그러니까. 그렇다고 무조건 환자나 환자 가족이 갑이라는 건 아니다. 환자나 환자 가족 역시 진상 손님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