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바깥은 여름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5. 1. 09:07
김애란
입동
한동안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꽤 얼떨떨 했다. 명의만 내 것일 뿐 여전히 내 집이 아닌데도 그랬다. 이십여 년간 셋방을 보유하다 이제 막 어딘가 가늘고 연한 뿌리는 내린 기분. 씨앗에서 갓 돋은 뿌리 한 올이 땅속 어둠을 뚫고 나갈 때 주위에 퍼지는 미열과 탄식이 내 몸안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퇴근 후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면 이상한 자부와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딘가 어렵게 도착한 기분. 중심은 아니나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밀려난 건 아니라는 아도가 한숨처럼 피로인 양 몰려왔다. 그 피로 속에는 앞으로 닥칠 피로를 예상하는 피로, 피곤이 뭔지 아닌 피곤도 겹쳐 있었다.
노찬성과 에반
손바닥에 고인 땀을 보니 문득 에반을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손바닥 위 반짝이던 얼음과 부드럽고 차가운 듯 뜨뜻미지근 하며 간질거리더 무엇인가가 그렇지만 이제 다시는 만질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옥죄었다. 하지만 당장 그것의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 지 몰라 찬성은 어둠 속 갓길을 마냥 걸었다.
건너편
이수가 공부를 그만둔 계기는 '도화'였다. (중략)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되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침묵의 미래
태어나 내가 처음으로 터뜨린 울음, 어쩌면 그게 내 이름이었을지 모른다. 죽기 전, 허공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어떤 이의 절망, 그것이 내 얼굴이었을지 모른다.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그것이 내 표정이었는지 모른다. 범란 직전의 댐처럼 말로 가득차 출렁이는 슬픔, 그것이 내 성정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내 이름을 못 왼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순 있다. 당신이 누구든 내 말은 당신네 말로 틀릴 것이다.
풍경의 쓸모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서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가리는 손
한동안 나 자신이 버리고, 뜨겁고, 미끌미끌한 덩이로 느껴졌다. 이름이 지워진 몇십 킬로그램짜리 영양 공급 팩이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나를 그렇게 대했다. 그게 격려나 존중의 형태였대도 그랬다.
엄마 발인 때 집안 어른들로부터 '긴 병에 효자 없다는데 네 엄마가 너 고생 안 시키려고 그리 급히 떠났나보다'라는 얘길 들었다. 그 말은 나를 몹시 아프게 찔렀는데, 정말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한 적 없는지 자문했을 때 쉽게 답하지 못한 까닭이다. 내 효심이 우리의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면 어쩌나 늘 두려웠다. 아이 일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남편을 잃기 전, 나는 내가 집에서 어떤 소리를 내는지 잘 몰랐다. 같이 사는 사람의 기척과 섞여 의식하지 못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뜬 뒤 내가 끄는 발소리 내가 쓰는 물소리, 내가 닫는 문소리가 크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 중 가장 큰 건 내 '말소리' 그리고 '생각의 소리'였다. 상대가 없어, 상대를 향해 뻗어나가지 못한 시시하고 일상적인 말들이 입가에 어색하게 맴돌았다. 두 사람만 쓰던, 두 사람이 만든 유행어, 맞장구의 패턴, 침대 속 밀담과 험담, 언제까지 계속 될 것 같던 잔소리, 농담과 다독임이 온종일 집안을 떠다녔다. 유리벽에 대가리를 박고 죽는 새처럼 번번이 당신의 부채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야 나는 바보같이 '아, 그사람, 이제 여기 없지......'라는 사실을 처음인듯 깨달았다.
(★★)
이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다. 첫번째 단편을 읽으면서 느낀 분노가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도 비슷하게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가족을 잃은 그 마음으로 다시 읽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