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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8. 바깥은 여름
    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5. 1. 09:07

    김애란

    * 문학동네

     

    입동

    p11.
    한동안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꽤 얼떨떨 했다. 명의만 내 것일 뿐 여전히 내 집이 아닌데도 그랬다. 이십여 년간 셋방을 보유하다 이제 막 어딘가 가늘고 연한 뿌리는 내린 기분. 씨앗에서 갓 돋은 뿌리 한 올이 땅속 어둠을 뚫고 나갈 때 주위에 퍼지는 미열과 탄식이 내 몸안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퇴근 후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면 이상한 자부와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딘가 어렵게 도착한 기분. 중심은 아니나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밀려난 건 아니라는 아도가 한숨처럼 피로인 양 몰려왔다. 그 피로 속에는 앞으로 닥칠 피로를 예상하는 피로, 피곤이 뭔지 아닌 피곤도 겹쳐 있었다.
    p18.
    아내와 나는 복분자액이 터진 날의 일을 따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다음날 바로 본가로 내려갔고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나날을 보내려 애썼다. 그러니까 어제와 같은 하루, 아주 긴 하루, 아내 말대로라면 '다 엉망이 되어버린' 하루를.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 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드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이유도,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 빚을 내서라도 내 집이라는 공간, 그래도 안심이 되는 공간. 그래서 나름대로 마음을 써서 가꾸는 공간. 그러나 예기치 못하 영우의 사고로 가족들은 복부자액이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과 마찬가지였다. <비밀의 숲> 드라마의 과장님 사연처럼 느껴져서 더 안타깝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힌 사람들은 선택하고 싶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 현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어쩌면 매몰찬 위로를 하고 싶어진다.

     

    노찬성과 에반

    p61.
    - 있잖아, 에반. 나는 늘 궁금했어.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픈 건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걸까?
    - ......
    - 에반, 많이 아프니? 내가 잘 몰라서 미안해.
    p80.
    손바닥에 고인 땀을 보니 문득 에반을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손바닥 위 반짝이던 얼음과 부드럽고 차가운 듯 뜨뜻미지근 하며 간질거리더 무엇인가가 그렇지만 이제 다시는 만질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옥죄었다. 하지만 당장 그것의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 지 몰라 찬성은 어둠 속 갓길을 마냥 걸었다. 

    (★) 사람보다 동물이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 동물에게 자신을 먼저 챙기느라 동물이 우리를 바라봐주는 것만큼 행동하지 못할 때도 있다. 읽다 보면 금이가 생각난다. 우리 금이가 떠난 날에도 나는 출근을 했고, 죽기 직전의 강아지는 잘 다녀오라 배웅을 했다. 금이야... 미안해.

     

    건너편

    p95.
    이수가 공부를 그만둔 계기는 '도화'였다. (중략)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되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p114.
    -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

    (★) <봄날은 간다> 영화가 생각났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는 대사. 사랑이 변한게 아니라 소멸한 것 같은 기분. 이미 끝난 사이란 걸 알면서도 오랜 시간 쌓은 추억과 정 때문에 차마 떨어지지 않은 말들이 하나의 사건을 트집을 잡아 상대의 잘못으로 몰아가고 결론을 낸다. 그리고 돌아오는 안도의 시간. 내 잘못은 아니었고, 끝내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되었단 생각.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또 그리워지지 않을까? 

     

    침묵의 미래

    p121.
    태어나 내가 처음으로 터뜨린 울음, 어쩌면 그게 내 이름이었을지 모른다. 죽기 전, 허공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어떤 이의 절망, 그것이 내 얼굴이었을지 모른다.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그것이 내 표정이었는지 모른다. 범란 직전의 댐처럼 말로 가득차 출렁이는 슬픔, 그것이 내 성정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내 이름을 못 왼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순 있다. 당신이 누구든 내 말은 당신네 말로 틀릴 것이다.
    p126.
    이곳 사람들은 '혼자'라는 단어를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만지고 또 만졌다. 몸에 좋은 독이라도 먹듯 날마다 조금씩 비관을 맛봤다. 고통과 인내 속에서, 고립과 두려움 속에서, 희망과 의심 속에서 소금처럼 하얗게, 하얗게 결정화된 고독...... 너무 쓰고 짠 고독, 그 결정이 하도 고유해 이제는 누구에게도 설명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입을 잘못 떼었다가는 한꺼번에 밀려오는 감정과 말의 홍수에 휩쓸려 익사당할지 모르니까.

    (★) 참 공포스러운 디스토피아 SF 소설 같았다. 가능하기도 한 암울한 미래. 소수언어 민족인 내가 느낄 이 공포를 영어권이나 중국어, 스페인어권 애들은 알려나 모르겠다.

     

    풍경의 쓸모

    p176.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서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 사람은 자신의 치부를 아는 사람들을 뒤에서 잘못 되도록 한다. 그 치부가 영원히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가리는 손

    p180.
    한동안 나 자신이 버리고, 뜨겁고, 미끌미끌한 덩이로 느껴졌다. 이름이 지워진 몇십 킬로그램짜리 영양 공급 팩이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나를 그렇게 대했다. 그게 격려나 존중의 형태였대도 그랬다.
    p192.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p195.
    엄마 발인 때 집안 어른들로부터 '긴 병에 효자 없다는데 네 엄마가 너 고생 안 시키려고 그리 급히 떠났나보다'라는 얘길 들었다. 그 말은 나를 몹시 아프게 찔렀는데, 정말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한 적 없는지 자문했을 때 쉽게 답하지 못한 까닭이다. 내 효심이 우리의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면 어쩌나 늘 두려웠다. 아이 일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다.

    (★) 사람들은 왜 남일에 관심이 많은가? 나 역시 가십을 소설책 읽는 기분으로 읽는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현실이 아닌, 책을 통해 읽게되는 비현실적인 내용이... 사실 요즘에도 너무 많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p218.
    남편을 잃기 전, 나는 내가 집에서 어떤 소리를 내는지 잘 몰랐다. 같이 사는 사람의 기척과 섞여 의식하지 못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뜬 뒤 내가 끄는 발소리 내가 쓰는 물소리, 내가 닫는 문소리가 크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 중 가장 큰 건 내 '말소리' 그리고 '생각의 소리'였다. 상대가 없어, 상대를 향해 뻗어나가지 못한 시시하고 일상적인 말들이 입가에 어색하게 맴돌았다. 두 사람만 쓰던, 두 사람이 만든 유행어, 맞장구의 패턴, 침대 속 밀담과 험담, 언제까지 계속 될 것 같던 잔소리, 농담과 다독임이 온종일 집안을 떠다녔다. 유리벽에 대가리를 박고 죽는 새처럼 번번이 당신의 부채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야 나는 바보같이 '아, 그사람, 이제 여기 없지......'라는 사실을 처음인듯 깨달았다.
    p228.
    위안이 된 건 아니었다. 이해받는 느낌이 들었다거나 감동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리로부터 당시 내 주위 인간들에게선 찾을 수 없던 한 가지 특별한 자질을 발견했는데, 그건 다름아닌 '예의'였다.
    p260.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 제자를 위해 의인이 된 남편. 

     

    작가의 말

    p262.
    하지 못한 말과 할 수 없는 말
    해선 안 될 말과 해야 할 말은 
    어느 날 인물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
    이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다. 첫번째 단편을 읽으면서 느낀 분노가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도 비슷하게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가족을 잃은 그 마음으로 다시 읽어보았다.
    (+)
    읽었던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읽었다. 세번째라는 사실이 놀랍지만, 줄거리를 기록하지 않아서라고 탓했다. 그런데, 첫 문장을 읽자마자 또 줄거리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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