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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7.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5. 1. 08:46

    박완서

    p6.
    나의 생생한 기억의 공간을 받아줄 다음 세대가 있다는 건 작가로서 누리는 특권이 아닐 수 없다.
    p30.
    우리는 그냥 자연의 일부였다. 자연이 한시도 정지해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고 변화하니까 우리도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p41.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성냥불 켜는 걸 두려워해서 불편한 적도 많았지만, 할아버지 담뱃불을 못 붙여 드렸을 때가 가장 슬펐다. 할아버지를 위해서 무언가 내 속의 한계 같은 걸 박차 보려고 허둥대면서도 그렇게 안 되던 조바심과, 난 왜 이렇게 못났을까 싶은 자기 혐오 등, 복잡한 심리적 갈등까지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p89.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로 달개비 만큼이나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데나 있었다. (중략) 나는 마치 상처 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p105.
    그러나 만약 그 때 엄마가 내 도벽을 알아 내어 유난히 민감한 내 수치심이 보호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민감하다는 건 깨어지기가 쉽다는 뜻도 된다.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못된 애가 되었을 것이다. 하여 선한 사람 악한 삭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는 동안에 수 없는 선악의 갈림길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p170.
    눈물이 날 것처럼 참담한 고행 길이었다. 둘이 만났다 하면 그렇게도 죽이 잘 맞아 온종일 수다를 떨어도 미진했었는데 그날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뜨악한 마음으로 헤어졌다. 서로 마음이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그걸 어떻든지 만회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p211.
    감수성과 기억력이 함께 왕성할 때 입력된 것들이 개인의 정신사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듯 결정적이라는 걸 생각할 때, 나의 그런 시기의 문화적 환경이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너무도 척박했었다는게 여간 억울하지 않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밑바닥 가난 속에서도 드물게 사랑과 이성이 조화된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 덕이었다고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강경애의 소설을 읽고 나서였다.
    p256.
    "원, 그것도 소설이라고 썼는지"
    나의 죄어들었던 심장이 펴지면서 얼굴이 모닥불을 담아 부은 것처럼 달아올랐다. 그 후에도 엄마의 그 차가운 평은 문득문득 나에게 상처가 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결코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만은 삼가리라고 다짐하는 것으로 엄마에 대한 앙심을 달랬다.
    p306.
    "어쩌면 나 시민증 하나 그냥 좀 내다 줄 빽도 없냐 우린."
    이런 소리까지 부끄러움 없이 했다. 어쩜 우리 오빠가 저렇게까지 비굴해질 수 있을까. 피해 망상의 결과겠지만 비굴은 피해 망상보다 더 꼴보기 싫었다. 안보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묶인 한 운명의 줄을 끊을 가망은 없었다.

     

    (★)
    읽으면서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일반인 입장에서는 일제 시대를 포함한 근대사를 사는 일반인들의 이야기를 접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거니.

타인의 시선으로... Omniscient P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