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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5. 여름의 빌라
    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4. 30. 13:30

    백수린

     

    시간의 궤적

    나는 서울에서 해보지 않은 모든 것을 경험해볼 생각이었고, 더이상은 후회로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눈에 언니는 주저함이 없고, 용감하고, 언제나 반짝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용감한 게 아니야. 단지 그러는 척 하는 거지. 척을 하다보면 그래지기도 하니까."
    "우리는 전부를 걸고 낯선 나라에서 인생을 새로 시작할 만큼 용기를 내본 적 있는 사람들이니까, 걱정 마.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스스로 원하는 걸 찾을 줄 아는 사람이야."
    창 밖을 다시 바라봤다. 이제 바깥은 먹색으로 가득했고, 어둠 속에서 흰 거품만이 주기적으로 부서져 내렸다. 완벽히 새로운 삶이라는 언니의 말을 듣고 나자 나는 완벽한 유배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자각이 들었고, 그러자 알 수 없는 패배감이 가슴속에서 피어났다.

     

    여름의 빌라

    같은 장소를 보고도 우리의 마음을 당긴 것이 이렇게 다른데, 우리가 그 이후 함께한 날들 동안 전혀 다른 감정들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요. 무無. 당신의 집 거실에 적혀 있던 글자처럼, 사실은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그저 받아들였으면 좋았을텐데.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미욱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걸까요.

     

    고요한 사건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서, 소음보다 참기 힘든 것이 악취라는 것을 나는 배웠다. 소음은 창문을 닫으면 어느 정도 해결되었지만 악취는 창을 닫아도 창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폭설

    그녀는 그런 엄마의 특별함을 사랑했다. 그것은 그녀가 기억하는 한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사계절 내내 미풍에도 빛깔을 달리해 반짝이는 잎이었다면 그녀의 아빠는 조용하고 균형잡힌 나무 같은 사람이었다.
    엄마는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행복해 보였다. 적어도 그날은 그녀 눈에는. 그리고 행복한 엄마를 보자 반사적으로 아빠가 떠올랐다. 그녀가 엄마와 함께 있는 동안 혼자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 혼자 형광등을 켜고, 또 혼자 텔레비전을 틀 아빠가. (중략)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어쩌면 미국에 갈 때마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엄마의 불행한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사라지고 난 이후 그녀에게 생긴 커다란 구멍처럼 엄마에게도 메워지지 않는 구멍이 생겼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그녀는 엄마가 한순간 잘못된 선택을 했지만 실은 그녀를 떠난 것을 후회하고 있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엄마 역시 선택을 했다는 것이, 그 선택의 순간에 그녀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과 달리 엄마는 자식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것이 그녀에게 명확해졌다.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흑설탕 캔디

    할머니는 점점 늘어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채웠을까? 처음에 할머니는 집안일을 다 하고도 시간이 남으면 혼자 녹차를 한잔 끓여놓고 식탁에 앉아 한국에서 가져온 성경책을 읽었다. 그러다 집에만 있는 것이 지루해지자 집 근처를 산책하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혼자 타는 것은 길을 잃을까 두려웠지만, 동네를 걷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략) 프랑스어로 말할 수 없었으므로, 집을 벗어나면 할머니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할머니 안의 고독은 눈처럼 소리없이 쌓였다. 처음엔 곧 녹을 수 있을 듯 얇은 막으로. 하지만 이내 허리까지 차오를 정도로 두텁고 단단한 층을 이루었겠지.
    오래전,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직 새파랗게 젊던 시절에 할머니는 늙는다는 게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굳는 속도에 따라 욕망이나 갈망도 퇴화하는.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인간이 평생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인간을 늙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생에 무언가를 기대한다니 얼마나 바보같은 일인가. 그렇게 평생 동안 배신을 당해놓고도.

     

    아주 잠깐 동안에

    그는 그녀를 끌어 안아주면서, 우리는 안고 있어도 왜 이렇게 고독한 것일까, 속으로 되뇔 뿐이었다.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나는 무엇이든 선택을 할 때면 그 대가로 미래를 지불해야 하는 줄 몰랐던 날들이 이미 까마득히 멀어졌음을 안다.

     

    (★)
    개인적으로는 <폭설>과 <흑설탕 캔디>가 기억에 남는다. 타인에게 기대는 마음. 타인들 속에 들어가는 두려움. 그 마음들이 고스란히 느껴져서인가.

타인의 시선으로... Omniscient P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