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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1.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5. 6. 2. 10:00
여덟 가지 키워드로 고전을 읽다
김진영
* 메멘토
독서모임에서 고전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소설이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고전의 경우 동시대를 뛰어넘는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많아 재밌기도 하지만, 나보다 잘 알고 있는 누군가의 설명을 들으며 읽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고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
(★) 개인 생각 및 의견
강의를 시작하며 : 주관적 소설 읽기
p7.
소설은 전방위적 관점으로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같은 소설이라도 그때그때 다른 관점으로 읽을 수 있어요.p7.
이런 점에서 적어도 제가 책, 특히 소설을 읽는 이유는 지금 우리 삶에 대해 물어보는 데 있습니다. 그것도 긍정적인 관점이 아니라 비관적인 관점에서요. 부정적으로 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평이 본래 있는 대로 보겠다, 숨김없이 보겠다는 뜻이죠.p8.
우리는 긍정적 독서 교육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경우, 교훈 찾기를 배우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 삶에 문제가 있어서 글을 읽는데, 그 글을 교훈성에 기초해서 읽으려고 하면 내게 있는 문제가 해결되기보다는 정당화되기가 쉽습니다.p9.
소설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 때문인지 저는 소설이 점점 이상하게 기능화되는 점에 대한 분노가 많습니다. 책 한 권을 어떻게 읽느냐 하는 것은 내 삶을 어떻게 보느냐 또는 우리 사회, 우리 문화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보는 방법이 회로화 되어 버리면 뭘 보든 그 회로를 따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책 한권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다른 영역에서도 충분히 새로운 관점을 가질 가능성을 발견하거나 경험하는 사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이어지는 교육이 뭘까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보기를 가르치는 것, 독서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유용한 방식, 잘 기능할 수 있는 방식의 읽기 또는 보기를 가르친다는 말입니다.(★) 젊었을 때(?)는 소설 읽기를 정말 좋아했는데, 나이를 먹으니 오히려 싫어진다는 생각을 했다. 비슷비슷한 내용, 개인적으론 불륜 등의 소재가 너무 싫은데...내 주변에서 내가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 불륜 커플이 없기도 하지만 어쩌면 막장이란 단어로 해당 소재를 정의하고 있었기 때문인가 보다. 대신 요즘에는 다양한 사람의 삶을 다루는 소설들이 나오면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슬픔이나 아픔을 간접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삶에 대해 감사한 마음은 그 때 살짝 들어오게 된다.
1강.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p16.
이반 일리치의 삶이 뭡니까? 저는 그걸 스노비즘, 허위의식에 물든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갖지 않고도 가진 듯 꾸며서 살아가는 것, 자본주의 후기에 나온 문제 말입니다. 이반 일리치의 깨달음이 결국 이 모든 게 '가짜였다, 거짓말이었다'는 화두에 있지요.p21.
과거에는 묘지가 따로 없었습니다. 서구에서는 시신을 교회 뒷마당에 버리면 그만이었는데, 묘지가 개인화되고 큰 의미를 지니면서 숭배 대상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아리에스가 '관 속은 텅 비어 있는데 묘지는 의미로 가득한 장소가 되어 간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잊어버리고 묘지에만 큰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입니다.p23.
죽음은 결코 삶의 공간에 자리 잡으면 안 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이 달라야 한다는 죽음 소외, 죽음 분리가 제도화되고 있습니다.p26.
"이 사람들이 나에게서 죽음을 박탈하고 있다."p25.
한편 법적 장치도 있습니다. 존엄사 문제 아시죠? 살 때는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다가 죽을 때 갑자기 생명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존엄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법적 장치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감춰져 있던, 인정하고 싶지 않던, 언로가 봉쇄돼 있던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응시할 피룡가 있습니다. 다 자본주의 총체성 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죽음입니다.p29.
오늘날 죽음은 장사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기본 논리가 인신매매와 같아요. 그것도 죽어가는 사람을 끌어다 진행되죠. 죽기가 너무 힘듭니다. 이반 일리치도 '나 좀 죽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죽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죽기가 얼마나 힘든지, 마침내 떠나는 때가 빨리 오기를 바랄 수도 있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화사적으로는 죽음이 현대성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너무 어두운 테마라서 이야기하기를 꺼리고 그것을 단순히 생체적·자연적 문제로만 받아들이지만, 실제로는 죽음이 얼마나 우리 삶에서 핵심으로 작용하며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p31.
결국 톨스토이 세계관의 뿌리는 윤리 또는 도덕에 있습니다. 여기에 종교가 엉키면서 이웃 사랑이라는 특유의 실천적 개념이 나옵니다.p33.
내부 시선, 즉 그의 시선은 동시에 두 공간으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병들기 전, 죽음이 삶에 들어오기 전이고 다른 하나는 병든 다음입니다. 그가 병든 뒤 처음에는 자기 죽음에 대해 의사에게 의지하지만, 차츰 죽음에 대한 자의식이 생기고 외부 문제였던 죽음이 그 자신에게 침투되면서 절대 고독의 공간에 도달합니다.p35.
전복적 관점과 사고가 필요합니다. 문학은 원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연결을 끊는 힘입니다. 이미 아는 것을 또 이어 간다며 의미가 없죠. 저는 늘 독서가 전복이라고 말합니다. 다르게 읽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이반 일리치는 그토록 바라던 편안함을 얻기 위해 숨을 끊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p37.
소설은 그때그때 다른 관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중심이 옮겨지고 전혀 다르게 읽히는 것이 소설입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관점에서 읽어 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회 비판적인 면입니다. (중략) 두 번째는 이 강의에서 제시한 죽음의 권리를 되찾는 면입니다. (중략)
톨스토이가 기독교적 죽음관을 드러내려 한 면도 봐야 합니다.p45.
죽음은 철저하게 개인적 사건, 즉 절대 고독의 사건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죽을 때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고통을 이해하는 과정이 결국 절대 고독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p47.
죽음을 박탈한 것은 편안한 삶이죠. 죽음을 내쫓는 대신 편안한 삶을 얻었습니다. 교환이죠. 우리 삶은 철저한 교환입니다. 절대로 공짜는 없어요. 제대로 된 교환이냐, 잘못된 교환이냐가 문제죠. 내 삶을 주고 죽음을 가져오면, 박탈당한 죽음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p51.
성찰은 인간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스스로 생각 없이 산다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실제로는 '성찰적 거리'를 두지 않고 생각만 합니다. 결국 매번 똑같은 생각만 하고 성찰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배우면서 질문할 줄 모르고, 의심할 줄 모르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의미하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회의주의에 빠지라는 말이 아니라 사유를 통해 검증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고 : <이반 일리치의 죽음>
(★) 신기하게도, 평소 죽음에 관해 생각했던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놀랐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아직 젊은데 무슨 죽음 이야기를 하냐, 너 요즘 문제가 많냐 등등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간주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떻게 인간적으로 죽을 수 있을까? 나의 존엄을 죽는 순간에도 지킬 수 있을까? 죽을 때 후회하는 인간이 되지는 말아야 하는데 등등...
2강. 괴물
<변신>, 프란츠 카프카
p57.
세계문학사에서 현대문학을 여는 노크 소리로 여기는 첫 문장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 문장이죠.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흉측스런 벌레로 변해 버린 것을 발견했다."p58.
불투명성을 추구하는 글이 많지만 카프카 같은 사람은 드물죠. 아무리 읽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정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정답이 많은 것이겠죠. 카프카의 문학은 불투명성의 투명성이 있어요. 다 맞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전혀 안 맞는, 맞추면 맞출수록 안 맞는 것이 분명하거나 그것만으로는 다 열리지 않는 경우죠.p58.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쓰는 글이 있어요. 체화된 생각 자체가 글로 쓰이는 겁니다. <변신>이 바로 그렇죠. 어디까지가 의미 구조고 어디까지가 무의미성(육체)을 지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렵게 여길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p61.
한마디로 그에게 삶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거의 동물적이죠. 결코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뚫고 나가는 힘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여기에 문학적 의지를 다 투여한 사람이에요. 카프카를 이렇게 읽기 시작하면 그는 결코 패배적인 영역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p61.
카프카는 문학에서 늘 승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승리하는가에 대한 분석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주 묘하고 어떻게 보면 아주 책략적이죠.p62.
카프카는 머리가 워낙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 또는 정신으로만 머리가 좋은 사람은 비현실성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현실을 놓쳐 버립니다.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파는 경우죠. 그런데 육체는 절대 현실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각만큼 정교한 사유는 없다고 합니다. 신체는 언제나 잔혹합니다.(★) 몸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아직은 정확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몸에 익혀진 경험이 녹아진다고 하지만... 어쩌면 자전적 소설이 대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만, 내가 겪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과거를 돌아보며 쓰는 소설들도 있다. 아마도 이런 경우도 몸으로 쓰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메모를 적는 내내 들기도 하다. 간접 경험도 경험일테니까.
p63.
카프카는 체코 사람인데 독일어, 정확히 말하면 체코 독일어라는 특별한 언어를 썼어요.(★) 독서모임에서 사람들이 소개한 작품 중 일부는 작가가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익혀 그 외국어로 작품을 쓴 책이었다. 어쩌면 카프카도 이질적인 관념으로 글을 썼던 것은 아닌지, 외국어라는 특징이 그의 작품을 더 돋보이게 해준 것은 아닐까...
p69.
문학을 지키고 삶에서 해방되려면 아버지와 여자를 포기하면 되는데, 삶과 문학은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가 없어요. 문학을 하려면 문학을 할 수 있는 영양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 영양분이 삶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분법이 무너지는 겁니다. 그럼 어덯게 삶으로부터 해방되면서 피룡한 영양분은 섭취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좋은 것만 가지려고 하는 묘한 논리죠.p72.
문학은 삶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문학이 삶과 공유되어서는 안 돼요. 어떻게 문학이 삶과 관계를 끊으면서도 필요한 영양분, 피를 얻어낼 것인가?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여자라는 매개가 있어야 해요. 혼자서는 못합니다. 편지(박쥐)를 날려 보내 여자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게 문학입니다. 자신은 전혀 삶에 가담하지 않고도 문학에 필요한 영양분을 충분히 얻어요. 카프카에게 여자는 이런 기능을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직접 이길 수 없을 때 여자를 통해서 아버지를 함락시킬 방법을 고민한 흔적이 바로 <변신>에서 보입니다.p79.
독자는 이 세상의 그물입니다. 모든 장치를 갖추고 세상에서 훈련된 로봇이에요. 독자에게 붙잡히면 세상에 붙잡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술가는 기본적으로 독자에 대한 미움과 불신이 있습니다. 독자에게 읽히고 싶어서 쓰기도 하지만, 독자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숨기는 것도 있어요. 또 작가가 일부러 그러기도 하지만 의도 없이 그러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읽어 내야 독서에요.p86.
살아가는 데 좋은 머리가 필요합니다 이 머리는 교양을 쌓는 머리와 달라요. 이게 신체의 능력이죠. 신체보다 영리한 게 세상에 없습니다. 뒤돌아보면 알 거예요. 신체가 위기에 정확하게 대처합니다. (중략) 신체라는 이름의 전략, 제가 볼 때는 삶의 참 모습이에요. 그래서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각하고 어려운 선택을 할 때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흔히 말하죠. 근본적으로 자신의 감각을 믿으라는 뜻입니다.같이 보기 >> <변신 - 카프카 단편선>
3강. 기억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p89.
아시다시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as Perdu)>는 원작 기준으로 7편 10권이나 되는 방대한 작품인데, 그 중 반은 프루스트 생전에 출판하고 나머지는 작가가 써 놓은 것을 갈리마르출판사에서 정리해서 펴냈습니다. 1편 <스완네 집 쪽으로>(3권), 공쿠르상을 받은 2편 <꽃 피는 소녀들의 그늘에서>(2권), 3편 <게르망트쪽>, 4편 <소돔과 고모라>까지 출판된 것입니다. 알베르틴 얘기가 많이 나오는 5편 <갇힌 여인>, 6편 <사라진 알베르틴>, 그리고 아주 중요한 부분인 7편 <다시 찾은 시간>은 프루스트가 원고로만 남겨 놓았지 그걸 정서하거나 출판하지 못했습니다.p9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여러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앞에 말한 예술론은 물론이고 정치소설로도 볼 수 있어요. 살롱문화와 부르주아 계급의 스비노즘에 대하 ㄴ가열하고 예리한 분석이 드러나죠.p98.
기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의지적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프루스트가 이야기한 '무의지적 기억'으로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적 기억'이며 더 폭넓게 이야기하면 '신체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억은 지나간 것에 대한 의식적 접근, 즉 의식 활동입니다. 절대로 무의식 활동이 아닙니다. 하지만 기억을 탈의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요.p101.
모든 것이 다 떠오르고 그것이 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순간은 일생에 한 번밖에 안 와요. 임종 때, 그래서 '오래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할 때 '잠자리'(침대)는 사실 '관'과 같습니다. 임종 자리에 미리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평생 겪은 일이 전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잖아요.p103.
임종의 침상은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우리가 평생 살면서 한 번도 체험해 보지 않은 시간대, 현재에 머무는 겁니다. 미래로부터 처음 해방되는 현재, 이 순간에 사유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과거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역류하죠. 기억이 역류하는 겁니다. 과거로 몰입하죠. 과거로 몰입하다 보면 벽을 만납니다. 우리의 기억 작용에 의식적인 수렴이 있기 때문에 어느 선까지 밖에 못 갑니다. 즉 망각이라는 경계선과 만납니다.p104.
의식은 까맣게 잊어버린, 그러나 신체는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 바로 망각의 영역입니다. 이 부분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프루스트가 소설을 못 쓰겠다고 하는 이유가 부분은 기억나는데 전체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망각의 경계를 못 넘어가겠다는 뜻입니다.p117.
우리의 감각이 눈앞에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을 때 더 강력해지는지 그것이 부재하지만 흔적이 있을 때 더 강력해지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있다가 없어지는 장소는 그냥 텅 빈 장소가 아니죠. 있다가 없어졌을 때 그 장소에서 더 강력한 감각, 더 강력한 촉감을 갖게 돼요. 이게 부재와 실재의 변증법입니다.p127.
천식을 앓던 프루스트에게 '내일의 날'이란 삶을 위해서 남겨진 시간이라기보다는 언제나 죽음이 다가올지 모르는 시간으로 여겨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산다는 것도 울적한 일이고 내일이라도 달라질 게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극심한 멜랑콜리 상태, 삶에 대한 절망과 불행을 드러내죠.p145.
프루스트가 보는 신체가 바로 이렇습니다. 유한한 시간적 존재로서 소멸하지만, 소멸할수록 기억의 경험이라는 아이를 잉태합니다. 이런 신체는 현대적 시간성에 대한 저항이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탈물질화되어 가는 신체는 삼분법적 시간을 따르지만, 감각의 경험을 저장하는 공간으로서 신체는 결코 삼분법적 시간을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류해요. 늙을수록, 없어질수록, 소멸할수록 뭔가 자꾸 생산되니까요.(★) 가끔 마음의 짐 같은 책들이 있다. 아직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죽기 전에 읽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사람들의 입소문, 혹은 인생의 역작. 그 중 하나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조만간 읽기에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025 목표로 삼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