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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2.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5. 6. 4. 10:00
여덟 가지 키워드로 고전을 읽다
김진영
* 메멘토
(★) 개인 생각 및 의견
4강. 광기
<모래 사나이>, 에른스트 호프만
p149.
<모래 사나이>는 '두려움이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소설일 수 있습니다. 모든 두려움은 큰 슬픔과 연결됩니다. 두려움과 슬픔이 다른 것으로 이해되지만, 사람 사는 데 모든 것이 구획되어 있지는 않죠.p153.
어두운 낭만주의는 합리성을 받아들이거나 합리성으로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을 테마로 삼습니다. '광기'나 '악몽' 같은 것이에요. 이런 것을 껴안으면 필연저긍로 합리성에 배척되죠. 어둠의 낭만주의는 합리성의 빛 속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어둠의 영역을 떠돌수밖에 없는 인간의 일면을 테마로 낭만주의 영역을 일군 것입니다.p154.
우리말로 옮기기가 대단히 어려운 단어를 제가 '으스스함'이라고 해 봤는데요, 그냥 두려운 게 아니라 왠지 모르게 기분이 안 좋은 겁니다. 두려움은 두려움인데, 실체가 확실하지 않아서 분위기로만 존재해요.p156.
그런데 후기 구조주의에서는 밤적인 것이 '광기'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어 쓰입니다. 광기는 이성의 범주에 절대로 속하지 않아요.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다루면서 이성이 어떻게 광기를 관리하려고 했는지를 보여 줍니다.p159.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해후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의식의 떨림, 불안한 상태를 으스스함이라는 개념으로 이야기합니다. (중략)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같은 일이 자꾸 반복되면 이상하고 특별한 분위기를 느끼죠. 이게 바로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으스스함입니다.p162.
기억은 없지만 기억의 흔적은 있습니다. 있던 것을 지우면 흔적이 남죠. 흔적이란 게 묘해서 지우려고 할수록 더 또력해집니다. 흔적은 없앨 수가 없어요. 프로이트는 기억이 없어져도 흔적은 남는다고 했습니다. 낯설지만 흔적이 있어서 친숙해 보이는 것, 여기서 두려움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으스스함입니다.p165.
트라우마는 어떤 사건이 정신에 남긴 상처, 쇼크에요. 그리고 트라우마는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하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이런 이미지는 장기 기억되고, 트라우마를 얻을 때와 비슷한 사건이 벌어지면 불안해지는 증상이 나타나죠.p165.
심리적으로 어떤 목적을 갖고 본다는 것의 전제는 '나'의 형성입니다. 내가 형성된 뒤에야 내 주변 것들이 객체, 대상이 되죠. 그래서 그 객체를 보는 겁니다. 주객 관계가 형성되죠. 어느 시기에 시선을 갖고 무엇인가를 볼 때 비로소 처음으로 내가 대상과 분리되는 체험을 하는 겁니다.p174.
자연 앞에서 우리는 몽상에 빠져들죠. 이렇게 빠져든다는 것은 안심 상태에 대한 증거예요. 아무것도 나를 거부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껏 거기에 푹 잠기죠. '텅 빔' 앞에서는 주체가 되지 않아도 돼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사실 이게 행복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이런 행복을 전혀 못 누립니다. 늘 조심하고, 늘 주인이 돼야 하잖아요.p184.
이런 상황에서 <모래 사나이>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만 기초해 읽을 필요는 없겠죠. 우리의 고독하고 우울한 상황과 사람이 아닌 죽은 것을 향할 수밖에 없는 시선 문화의 메멘토 모리로 읽어 볼 수도 있습니다.5강. 동성애
<베니스에서의 죽음>, 토마스 만
p192.
유럽의 정신사는 이런 전통의 맥락 안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럽이 경제적으로는 많이 쇠퇴한 것 같아도 정신적인 영역에서는 만만찮죠. 그들의 사유 내용이 아주 특별하고 높다기보다는 전통을 간직한 덕이라고 봅니다. 우리도 전통을 이어 왔다면 엄청난 지적 자산이 됐을 텐데, 그러지 못했죠. 외부에서 들어오는 지적 개념도 그때그때 단편적으로 소비하고는 내버렸습니다. 모든 새로운 것은 전통에서부터 나오잖아요. '비빌 언덕이 있어야 일어난다'는 말이 있어요. 전통이란 게 대단히 무섭습니다.(★) 사대주의는 아니지만 이상하게 유럽에서 공부한 사람들 혹은 유럽 작가들의 문학을 읽다보면 철학적인 부분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마도 이런 설명이 내가 들었던 생각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닐까...
p197.
도대체 아름다움이 뭔가? 이게 참 복잡합니다. 예술적으로 아름다움은 완벽한 형식을 이야기합니다. 아름다운 것이 신체성과 정신성 그리고 시민성과 예술성하고 어떤 관계를 맺고 피할 수 없는 죽음 문제와 어떻게 엉키는가를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어요.6강. 부조리
<이방인>, 알베르 카뮈
p217.
<이방인>에서 '이방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단순히 제3국이 아닌 전혀 다른 풍토에서 사는 사람이고, 그 때문에 우리가 아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뜻에서 이방인입니다.p218.
<이방인>에서 도덕의 문제가 나옵니다. 이 도덕을 끝까지 유지하려다 보니 모든 것을 도덕적을 설명해 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도덕 외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게 합니다. 온 세상, 온 삶이 도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되면서 도덕에 모두가 합의하고 아무도 도덕을 의심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일종의 지배 시스템이 존재합니다.p219.
카뮈는 동전의 양면처럼 사르트르(Jean-Paul Sattre)와 함께 떠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논쟁과 불화가 있었지만 대체로 모두 실존주의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카뮈는 절대로 자신이 실존주의자가 아니고 특히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관련이 없다고 했어요.p222.
카뮈의 삶과 문학에서 알제리가 차지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카뮈를 이해하려면 알제리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그의 문학에서 알제리를 형성하는 것이 돌멩이와 소금 냄새 등 여러가지인데 그 중심에는 태양이 있습니다. 그에게 알제리는 태양, 모든 것을 하나도 숨김없이 드러낼 만큼 강렬한 태양입니다.p223.
알제리 사람들의 삶은 생명으로 충만하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잡히는 우리 삶과 다르죠. 우리는 언제나 미래를 위해 생명력을 저장하고 아끼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결국 다 헛되고 미래는 이념이 만든다는 것을 누구나 알게 되지만, 이미 삶을 놓쳐 버린 뒤죠. 알제리 사람들은 현실, 지금 여기밖에 모릅니다. 에너지를 다 쓰고 자연스럽게 일찍 늙는 것을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요.p226.
살다 보면 세상 탓을 많이 하게 돼요. "무슨 놈의 세상이 이래!"하며 절망합니다. 절망의 근원은 이중 감정에 있습니다. 이 세상이 미워 죽겠는데 살아남으려면 세상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주 현실적인 지혜의 말이 있죠. "세상이 너를 바꾸지, 너는 세상을 못 바꿔." 어찌 보면 절망의 표현입니다. 절망은 '어쨌든 세상이 전부다. 다른 것은 없다'는 인식에서 와요. 글너데 세상에 세상과 무관한 공간, 세상을 둘러싼 타자의 세계가 있다면 절망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것이 바로 카뮈에게는 '세계'입니다. 허위와 부조리를 통해 배운 세상을 통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세계는 그의 문학에서 태양, 바다, 저녁 그늘, 소금 냄새 등으로 변주되어 나타납니다. 이런 것들은 자연이 아닙니다.p227.
카뮈가 자신은 '실존주의자가 아니라 부조리의 철학자'라고 했죠. 부조리는 시대 상황과 함께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패러다임, 중심이 허물어졌다는 뜻입니다. 신이 허물어지면서 많은 개체적 존재들이 단독자가 됩니다. 단독자의 등장이 바로 근대적 상황이고, 이때 만나는 문제는 삶과 죽음의 근본적인 모순입니다. 그는 철학의 가장 큰 테마가 '자살'이라고 했습니다.p229.
도피 방식은 여러 가지 입니다. 1차적으로 종교적 도피가 있죠.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것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인생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는 미적 단계죠. 삶을 향유하려는 태도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이성을 사랑하는 미적 태도인데, 이것으로는 도저히 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허무가 사라지지 않죠. 두 번째는 윤리적 단계로 인간의 도리와 선을 추구합니다. 이 단계도 딜레마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마지막인 종교적 단계로 가야만 딜레마로부터 빠져나가는 치유를 맛보게 된다는 것이 (단순하게 본) 키에르케고르의 이론입니다.p229.
그다음에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도피가 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하이데거죠.p230.
또 다른 도피 방식으로 문학적, 예술적 도피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카프카죠.p230.
그리고 도덕적 도피가 있습니다. 도덕은 선과 악뿐만 아니라 근대적 상황이 만들어 내는 의미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결국 인간이 처한 삶과 죽음의 딜레마를 어떤 제3의 의미로 치유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시작하는 모든 근대적 제도, 의미 체계를 도덕이라고 합니다.p230.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 카뮈에게는 크게 세가지 의미가 있어요. 첫째, 인식 행위입니다. 즉 삶의 상황, 부조리 상황을 외면하고 도피하기보다는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다음은 수긍과 인정, 즉 받아들이는 거죠. 근대적 삶의 부조리를 승인하는 겁니다. 그다음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요, 바로 행동입니다.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말고 행동하라는 것인데, 카뮈에게 행동은 상징적으로 여행을 뜻합니다.p243.
현대인은 죽음을 거부하고 도망치지만 오히려 죽음의 관리를 당합니다. 알게 모르게 삶을 죽음에 비춰 계산하거든요.(★) 카뮈의 작품을 읽어봤지만 제대로 읽지 않은 기분이 든다. 특히 이방인.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7강. 고독
<왼손잡이 여인>, 페터 한트겐
p253.
독일에서 영화로 제작되어 성공을 거두기도 한 <왼손잡이 여인>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왜 왼손잡이인가죠. 좌파를 떠올릴 수 있지만 삶에서 소외된 부분, '비정상'도 됩니다. 삶의 환경이 대개 오른손잡이에게 편한 쪽으로 맞춰져서 왼손잡이는 소외되기 마련이죠. '결정적인 것은 왼손에서 나온다'는 벤야민의 말처럼 왼손은 탈문화적이고 반문화적인 속성을 상징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합니다. 물론 반문화적이라고 해서 문화를 다 부정하지는 않죠.p259.
중산층 계급에게 타자는 없습니다. 비록 부인이라도 그저 투사의 대상일 뿐이에요. 타자의 본질, 그 사람 자체는 중요하지 않죠. 타자는 내가 '나'를 확인하는 데 필요한 오브제(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불행하면 상대도 불행해야 하고, 내가 기분 좋으면 상대도 기분 좋아야 하죠. 자기가 나르시시즘적 애정의 환희에 빠졌을 때는 부인이 지극히 사랑스럽게 보입니다.p272.
외로움과 고독은 다르죠. 고독은 어떤 영역입니다. 외로움이 일시적 감정이라면, 고독은 정신성이 더해진 삶의 필연적 영역이 아닐까 싶어요.p274.
<왼손잡이 여인>은 부르주아적 투사라는 현대사회의 인간관계를 비판적으로 보여 주면서 신체적 감각이 있는 자아가 끊임없이 상실되는 상황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사회에서 언제나 폄하되는 고독이라는 문제를 통과제의로서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죠. 고독이라는 공간 속에서 개인이 일상을 모험으로 재인식하고 자기를 활성화하는 계기를 만날 수 있는가, 왼손잡이로서 자기를 찾아갈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시하는 것입니다8강. 정치
<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p277.
볼라뇨가 속한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세계문학사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 줍니다.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미술적 리얼리즘'아리는 이름으로 세계 문학사에서 자리를 차지합니다.p295.
이 작품에서 시간은 '시간의 터널'과 '시간의 속살'(152쪽), 두 가지로 나뉩니다. 칠레의 역사는 시간의 터널을 지날 뿐 시간의 속살을 건드려 본 적은 없다는 겁니다. 뭔가를 새롭게 만들어 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역사의 시간이죠. 자연의 시간은 반복되면서 소멸되는 과정으로 미래가 없고요. 그런데 당연히 자연의 시간에서 역사의 시간을 구분해 내고, 역사의 시간을 이끌고 나가야 할 지식인들이 멜랑콜리에 빠져서 역사의 시간을 자연의 시간에게 줘 버리는 일을 반복해 왔다는 겁니다. 그 끝에서 희생되는 존재는 지하실에서 고문받는 사람이죠. 지하실에서 고문받는 사람은 곧 칠레를 상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