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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 이반 일리치의 죽음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5. 4. 25. 10:0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현대지성 / 윤우섭 옮김
독서 모임에서도 추천을 받았지만, 사실 김진영 철학자의 저서에서 이 작품에 대한 부분이 있어서 한번 읽어야지 했다가 읽게 되었다. 사실, 이 책에는 세 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두 '죽음'이란 키워드와 관련이 있다. 사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외의 작품은 재미로 따지면 재미가 있지 않았고, 조금 황당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 개인 생각 및 의견
이반 일리치의 죽음
p11.
사람들 머릿속에 그의 죽음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인사이동과 직무상 변화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 것과는 별개로, 그 부음을 들은 사람들은, 가까운 지인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늘 그렇듯, 죽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 사람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p27.
부인은, 이반 일리치가 보기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의 표현대로라면 "변덕스럽게", 삶의 즐거움과 품위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아무 이유 없이 남편을 질투했고, 자기에게만 관심을 가져달라고 했으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불쾌하고 무례하게 대했다.p29.
아주 일찍, 결혼 후 채 1년도 되지 않아 이반 일리치는 부부생활이란 것이 삶에 약간의 편리함을 안겨주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무척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며, 이와 관련하여 의무를 이행하려면, 즉 사회에서 인정하는 품위 있는 삶을 이어가려면, 일을 대할 때처럼 일정한 태도를 확립해야 함을 깨달았다.p59.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이반 일리치는 위안, 즉 다른 가림막을 찾곤 했다. 그러면 그 가림막들은 짧은 시간엔 그를 구한 듯 보였지만 이내 다시 산산조각 파괴되었고, 마치 모든 것을 꿰뚫는 듯 투명해져서 아무것도 그것을 가릴 수 없었다.p70.
매번 그랬다. 한 방울의 희망이 반짝이고 나면, 그다음 절망의 바다가 분노하고, 변함없이 통증, 변함없이 통증, 변함없이 우울함, 그런 후 모든 것이 똑같다. 혼자는 끔찍히 쓸쓸해서 누구든 부르고 싶었으나, 누군가가 있으면 상태가 더 나빠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p81.
그런데 이게 뭐야?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그럴 수는 없다. 삶이 그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이었을까? 그런데 만일 삶이 그렇게 역겹고 무의미하다면, 왜 죽어야 하고, 고통 속에 죽어야 하는 거지? 뭔가 잘못된 거다.p92.
그는 숨을 들이켰다가 뱉는 도중에 멈추고, 몸을 쭉 뻗고 생을 마감했다.* 참고 :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
주인과 일꾼
(★) 자신의 고집을 꺾지 못했던 주인이 죽어가는 일꾼을 살리기 위해 그렇게 옷을 벗어 남을 구하게 될 줄 몰랐다...
세 죽음
(★) 누구의 죽음인들, 누구의 삶인들, 귀하지 않으리오...
해제 / 윤우섭
1. 이반 일리치의 죽음 : 죽음 앞에서 깨달은 삶의 의미
p195.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슈제트(syuzhet, 문학 작품에서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나 사건 전개 발전의 일정한 체계)는 단순하다. 어쩌면 슈제트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사건이 있고 고찰이 있을 뿐이다.p196.
주인공이 주로 추구한 것 중 하나가 안락하고 편안하고 조용한 삶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임신, 출산 이후 아내와 부딪치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는 가족 문제에 신경 쓰지 않고 귀찮은 일을 애써 피하면, 다만 아내와 가장 편리하고 즐거운 관계를 구축하는 일에 골몰한다.p198.
올바르게 살지 않았음을 알았지만, 이 모든 거승ㄹ 어떻게 고쳐야 할 지 몰라서, 그것이 주된 고통이 된다. 자신은 "살아온 것"이 아니었고, 그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음을 깨닫는다. 주인공의 모든 두려움은 "나는 싫어!"하는 외침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그가 불가피한 죽음과 벌이는 마지막 투쟁이다. 평생 이반 일리치는 자신에 대해서만 걱정했다. 그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도록 관등, 돈, 인맥을 추구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자신과 자기 행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사심 없이 일하는 게라심의 단순한 지혜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그냥 그러한 삶을 모르고, 사람을 위해, 가족을 위해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p202.
작가는 장례식에 참례해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한 지인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인간의 부박함을 은연중에 질타한다. 지인들은 자기가 죽은 게 아니라는 것에 안도한다. 친구 표트르 이바노비치와 표도르 바실리에비치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직위로 승진 기회가 열린 것에 기뻐한다. 아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다 할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녀는 남편의 죽음으로 쵀되는 수입 축소에 직면해 국고에서 더 많은 돈을 받아낼 생각에 여념이 없다. 여기서 산 자의 죄가 잉태된다.2. 주인과 일꾼 : 이웃 사랑의 구현
p209.
그는 이제 "우리"라고 말한다. 그는 더 이상 자기만을 주장하던 "나"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의 사회적 구별은 사라져 이제 주인도 없고 일꾼도 없으며 오직 사람만이 존재한다. 바실리 안드레이치의 이기적인 원칙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고, 아(我)와 비아(非我)으 동일성이 이루어진다.p210.
<주인과 일꾼>은 1880년대 톨스토이의 윤리적·종교적 사상의 에술적 구현이다. 제목은 작품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기도 하다. 주인은 하느님, 일꾼은 사람이며, 결말은 영적 탐구 기간에 톨스토이가 당연하다고 인정한 일련의 기독교적 이상의 총화, 즉 이웃 사랑, 하느님 찾기, 진리의 깨달음이다. 작가는 종교적·윤리적 개념에 가시적 외형을 제공하고, 다듬어진 도덕률을 지상의 삶에서 구현할 가능성을 확인한다.3. 세 죽음 : 자연법칙에의 순응
p210.
이 작품은 서로 다른 세 형태의 죽음, 즉 귀부인, 마부 그리고 나무의 죽음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죽음에 대한 톨스토이의 초기 견해를 엿볼 수 있다.
작품 발표 직후에도 마지막 부분의 우화는 독자들에게 확실히 이해 되지는 않은 것 같다. 투르게네프는 1859년 2월 11일에 톨스토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작품이 전체적으로 마음에 들지만, 결말이 이상하며 그것과 앞선 두 죽음과의 관계는 전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