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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7-1. 다락방의 미친 여자
    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6. 11. 15:12

    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

    (★) >> 개인 생각입니다.

    초판서문

    p20.
    그런데 19세기 여성 문학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두 가지가 내내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19세기 여성 작가들이 처한 사회적 위치이고, 또 하나는 그들 자신의 독서 행위다. 우리가 연구한 예술가들은 삶과 예술 둘 다 실제로도 비유적으로도 감금되어 있었다. 압도적인 남성 지배 사회구조에 갇힌 여성 문인들은 커트루드 스타인이 '가부장적 시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던 문학 구조물에도 분명히 갇혀 있었다. 19세기 여성 작가는 남자들이 짓고 소유한 조상의 저택 (또는 오두막)에 거주해야 했을 뿐 아니라, 남성 작가들이 고안해낸 소설의 집과 예술의 궁전에도 갇혀 제한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자아·예술·사회를 전략적으로 재정의 함으로써 사회적 문학적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한 여성의 공통적인 투쟁 욕구를 들어 보이며, 여성문학에서 발견한 놀라운 일관성을 설명하기로 했다.

    (★) 책의 제목이 <제인에어>에서라니... 내가 중학생 때 읽었던 그 때의 소설의 느낌은 여주인공의 험난한 삶에 대한 불만족스러움과 동시에 결국 여성이 구원자(?)가 되는 결말이 신선하다는 정도.

     

    제 2판 서문

    p28.
    (샌드라) 부부가 감히 공통의 관심사를 갖는다는 이유로 보상받는 대신 대가를 치뤄야 했던 시대에, 더 정확히 말하면 남편이 지배하는 바로 그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보상받는 대신 대가를 치뤄야 했던 시대에, 우리는 학문의 길을 함께 가는 부부였다. 대학원 시절 내내 나는 그 대가를 치뤘다.

     

     

    1부 페미니즘 시학을 향하여

    1장 여왕의 거울

    여성의 창조성, 남성의 눈으로 본 여성 이미지, 문학에서의 부권 은유

    p75.
    ('시작하려는 의도로서의 소설')
    1) 한 개인이 창시하고 제정하고 확립하는 힘. 즉 시작의 힘.
    2) 이 힘과 이것에서 나온 산물은 이전보다 증식된다.
    3) 이 힘을 휘두르는 사람은 힘의 결과와 파생을 통제한다.
    4) 권위가 이 과정이 지속되도록 지켜준다.
    p76.
    실제로 나중에 사이드 자신도 대부분 문학작품의 관례를 볼 때 '작품의 통일성이나 완전성은 일련의 계보적 연결, 즉 저자-작품, 처음-중간-끝, 텍스트-의미, 독자-해석 등에 의해 유지된다'고 하면서, '이 모든것의 밑 바탕에는 계승, 부권, 위계질서의 이미지가 깔려 있다' (강조는 인용자)라고 말한다.
    p76.
    '새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다'라고 정의하는 모방 미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해 필립 시드니, 셰익스피어, 벤 존슨으로 이어진다. 이 정의가 의미하는 바는, 시인이란 작은 신처럼 또 다른 우주, 즉 (실재의 그림자를 실제로 붙잡아두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의 거울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p81.
    문학에서의 부권 은유는 (사회학적으로도 생리학적으로도 불가능하기에) 여성이 문학에 관여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 문학의 역사나 작품에서 '부권'의 개념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생각보다 아니 내가 무지해서 이렇듯 큰 Frame을 인지 못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한국 문학은 어땠을까? 하는 것도. 글, 아니 한글이 없던 시절의 창작은 구전이 아니라면, 일부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자들에 의해서만 전달이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도 단순히 부권은 아니더라도 권력에 의한 제약이 많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p107.
    예술품이 되든 성녀가 되든, 아름다운 천사 - 여자의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자신의 안락, 개인적 욕망, 혹은 둘 다를) 포기한다는 것이며, 그녀를 죽음과 천상으로 몰고 가는 것은 바로 이런 희생 행위다. 자아를 버리는 것은 고귀해지는 길일 뿐 아니라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없는 삶은 괴테의 마카리에의 삶처럼 사실상 죽은 삶이고 산 죽음이다.
    p122.
    모든 괴물 여자의 연관되어 있는 성적 혐오는 왜 그토록 많은 여자들이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여성 신체에 대한 혐오감을 (또는 적어도 불안감을) 끊임없이 표현해왔는지 설명한다.

    (★) 백설공주는 늘 이해가 안되는 이야기다. 계모는 늘 전처의 아이를 싫어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의 해석과 함께 보게 되니 이해가 더 쉽고 명확하게 되는 것 같다. 백설공주의 미래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백설공주가 처한 운명의 순환과 같이 냉혹하게 나에게 다가왔지만...

    p135. 
    '명상적 순수성'을 거부한 백설공주는 이제 '의미 있는 행위'의 삶을 시작해야 하는데, 여성에게 그런 삶은 마녀의 삶이라 규정된다.
    p136.
    여성 작가들이 남성 텍스트의 감옥에서 여성의 펜으로 탈출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그 출발점에서 자신을 '천사-여자'와 '괴물-여자'로 번갈아가며 정의하는 모습을 목도할 것이다.
    p137.
    자부심 가한 여성들이 남성 작가의 텍스트라는 유리관에서 나와 여왕의 거울을 폭파했을 때, 오래전 침묵 속에서 추었던 죽음의 춤은 승리의 춤, 언어를 향한 춤, 권위의 춤이 되었다.

     

    2장 감염된 문장

    여성 작가와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불안

    p146.
    여성 작가의 투쟁은 매번 여성 선배를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행위로만 시작할 수 있다. 여성 선배 작가는 부인하거나 죽여야 할 위협적인 힘이 아니라, 가부장적 문학의 권위에 저항할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된다.
    p148.
    강한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이라는 '남성적' 전통과 대조적으로, 작가 되기에 따른 여성의 불안은 여성을 심각하게 무력화한다. 이 불안한 여성에게서 달느 여성에게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엄격한 문학적 '아버지들'에게서 모든 '열등화된' 여성 후손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것은 불편함, 적어도 불만, 방해, 불신 등 여러가지 세균이다. 세균은 많은 여성 문학의 구조와 문체, 특히 (이 책에서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20세기 이전 여성 문학 전반에 얼룩처럼 퍼져 있다.
    p151.
    여자가 천사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괴물이 될 것이라고 경고 받는 사회에서 여자가 된다는 것은 쇠약해지는 것이다.

    (★) 공교롭게도 최근 이전 직장 여성 동료들과의 저녁 자리가 시작되는 시점에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여성 직장인"에 대한 비틀린 시선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다. 남자가 고집스러우면 뚝심있다고 하고 여자가 그러면 성격이 지랄맞다 하는 것. 꼼꼼히 일을 챙기다 날벼락 맞듯 성격이 예민하고 대범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한참을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아직도 우리는 직장에서 유리 천장이 아니라 유리벽, 유리바닥이 존재하는 것 같다. 또한 여성의 히스테리를 여성의 생식기와 연관짓는 것은... 할 말이 없다.

    p168.
    모든 여성의 삶과 시, 그리고 선택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간단히 말해, 여성 문인이 세계 내에서 자신의 공적 현존을 규정해야 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든 똑같이 항상 자기 조재를 비하하는 결과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여성문인은 자신의 작품을 전적으로 억압하거나 작품의 출판을 필명이나 익명으로 출판해야 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 그녀는 겸손하게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고백하고, 열등한 노력에 걸맞게 숙녀들을 위한 '더 하찮은' 주제에 집중해야 했다. 후자의 선택이 실패의 인정으로 보인다면 여성문인은 반항할 것이며 그 결과 불가피하게 추방당할 것이다. 그리하여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 여성 작가는 당황스러운 이중의 속박에 갇혀 있었다. 여성 문인은 자신이 '단지 여자'일 뿐임을 인정하거나 '남자만큼 훌륭하다'고 저항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p176.
    여성 작가는 '작가의 정신분열'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질병에 특히 취약하다. 왜냐하면 여성작가는 가부장적인 플롯이나 장르를 사용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에 참여함으로써) 이중성이나 불신에 불가피하게 연루된다는 것을 그녀 자신이 암암리에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p183.
    여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양피지에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쓴 것 같은 문학작품을 생산했다. 이런 작품들의 외관은 표면의 무늬가 훨씬 깊고 접근하기 어려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가 더 어려운) 층위의 의미를 감추거나 흐려놓았다. 작가들은 이렇게 가부장적인 문학의 표준에 순응하는 동시에 그것을 전복시킴으로써 진정한 여성 문학의 권위에 도달하는 어려운 임무를 해냈다.

    * <여성의 상상력> 페트리사 마이어 스펙스

    p189.
    실제로 여성이 쓴 많은 소설과 시에는 미친 여자가 출현한다. 그렇게 해서 여성 작가는 자신이 파편화되었다는 여성 특유의 느낌, 그리고 자신의 실제 모습과 강요받는 모습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된 자신의 예리한 의식과 타협할 수 있었다.

    (★) 나는 여성 작가의 작품에서 읽기 불편한 점 중 하나가 여성의 모습이 극도로 비현실적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어쩌면 거울을 사이에 두고 혹은 부권 문학에서의 생존 때문이었다는 걸 이제는 이해하게 되었고, 측은함을 느끼고 있다.

    p196.
    '인류의 반을 차지하는 사람의 개인적 삶'을 말하는 그들의 소설과 시는 마치 피어시가 '말하지 않는 법을 버리기'라고 말했던 투쟁을 기록할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 
    p199.
    <의무에 얽매여> 살럿 퍼킨스 길먼 중에서 
    청하지도 않았는데 미리 부과된 의무, 
    자연의 법칙이라는 강력한 힘으로 옥죄고 있나니,
    적대적인 생각의 압박,
    마음 속을 후비네, 매 시간.
    힘을 낭비하고 있다는 인식이.

    (★) 감염된 문장이 있다면 '회복할 자아, 여왕'도 있다는 문구가 가슴에 들어온다.

     

    3장 동굴의 비유

    p214.
    동굴은 (프로이트가 지적했듯이) 여자의 장소이고, 자궁 모양의 폐쇄된 공간이며, 비밀스럽고 대개 신성한 대지의 집이다.
    p216.
    그러나 자궁 모양의 동굴은 여성의 힘이 생겨나는 장소이자 세계의 중심, 신비한 변화를 위한 위대한 대기실 중 하나다. 일종의 동굴인 모든 여자에게는 말살이라는 동굴의 은유적인 힘, (보부아르가 다른 곳에서 말했던) '대지 내부에 있는 밤'의 힘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수많은 전설에서 우리는 영웅이 어머니의 그림자 (동굴, 심연, 지옥) 속으로 떨어진 뒤 영원히 길을 잃어버리는 장면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 동굴이 여성이라는 상징 하에 부정적 묘사의 케이스는 아마도 남성 중심의 문화 속에서 그들의 내면에 심어진 왜곡된 혹은 남성만의 시각으로 해석된 여성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p216.
    플라톤의 동굴에 반쯤 눈이 먼 채 꼼짝없이 묶여 있는데, 어떻게 여자가 귀신의 본질과 자신이 보는 것을 구분하고, 자신의 진정한 창조적 본질과 동굴의 주인이 실재라고 주장하는 믿을 수 없는 그림자를 구분할 수 있겠는가?
    p218.
    여성은 동굴일지도 모르지만 (메리 셀리가 주저하며 대응하는 바가 나타내듯이) 동굴을 알고 그 의미를 부석하는 사람은 남자다.

    (★) 동굴을 찾는 것이 첫 난제라는 셀리는 직장에서 '일' 외의 것에서 부딪히는 것들로부터 답답함을 느끼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던 것인가?

    p221.
    이 마지막 비유는 정신의 동굴로 들어가 그 곳에서 자신의 힘과 더불어 힘을 생성해온 전통의 흩어진 잎들을 발견한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다.

     

    2부 소설의 집 안에서

    4장 제인오스틴, 가능성의 거주자들

    p234.
    오스틴의 말이 얼핏 예의 바르게 보이긴 해도, 자기를 지우는 익명성과 자신의 예술은 그저 세밀황리 뿐이라는 겸손한 설명은 세계 전체에 대한 비판이며 나아가 거부이다.

    (★) 나도 반성한다. 나 역시 남성 평론가들과 비슷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여성이라서는 비판보다는 대다수의 작품이 결혼에 목을 매는 여성이 등장한다는 점이 싫었다는 변명을 해본다.

    p253.
    숙녀다운 신중함을 전부 지니고 있음에도 오스틴은 자신이 물려 받은 인습에는 가열차게 반항한다. 그러면서도 당시 대부분의 보수적인 작가들이 인정한 패러디 전략이라는 보호막 아래에서 자신의 이견을 표현한다. (중략) 오스틴이 패러디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이유는 여성을 직접적으로 깎아내리지 않는 상속된 문학적 구조들이 명백히도 부적절하다는 믿음 때문이다.
    요약) 오스틴의 재창조 근거
    1) 동료 여성작가의 작품을 찬양하고 즐김
    2) 오스틴 문화의 여자들은 로맨스 소설의 관습을 내면화함
    3) 작품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한계 상황을 잘 활용
    p264.
    오스틴의 사회에서는 결혼만이 소녀들이 자기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한 오스틴의 침묵은 그 자체로 일종의 진술이다. 오스틴 소설에 다른 문제들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소녀나 여자들의 삶이 얼마나 불충분한가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여성 작가인 오스틴 자신의 결핍을 증명한다.

     

    5장. 제인 오스틴의 겉 이야기(와 비밀 요원들)

    p304.
    마리아 에지워스는 분명 그녀의 저자(아버지)가 없다면 자신은 존재할 수도 창작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동시에 우리가 '여성이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불안'이라고 불렀던 그 문제를 자신이 아버지의 펜인 것처럼 글을 씀으로써 해결했다.
    p306.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중
    오스틴의 조카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생각해보면 고모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었는지 놀랍다. 고모는 독립된 서재가 없어서 작품을 대체로 공동 응접실에서 썼는데, 보통 응접실은 모든 종류의 일상사로 방해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p319.
    오스틴의 자아분열(상상력의 매혹과 그것이 비여성적이라는 인식에서 오는 불안)은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 경험하는 사준기 이후에는 대상이라는 지위를 받아들여야 하는) 모든 여성에게 고유한 딜레마에 대한 의식을 드러낸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오스틴의 모든 여자 주인공들이 묻는 질문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단지 타자로서만 성취를 이룰 수 있다면, 어떻게 나의 에고를 포기하게 되는 것일까?'
    p331.
    오스틴에게 작가가 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여성 인물들에게 부여한 구속에서 탈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오스틴은 전형적인 듯하다. 소설이란 작가의 주체성을 유지하고 숨기면서도 효과적으로 대상화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여성들이 소설에 지대하게 공헌해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오스틴은 자신의 소설들에서 본인의 미학적 풍자적 감수성에 의문을 던지고 비판하는 동시에, 예술의 엄격성에 의해 규율이 잡히지 않을 상상력의 한계를 언급하며 그 위험을 주장하고 있다.

     

    3부. 우리는 어떻게 타락했는가? 밀턴의 딸들

    6장. 밀턴의 악령

    가부장적 시와 여성 독자들

    p359.
    단어들은 사람이다. 알파벳을 쓸 때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 애나 햄프스테드 브랜치
    p361.
    문학적 부권 은유에 대한 논의가 암시하듯, 독자든 작가든 문학적 여성들은 모두 유일한 아머지 신을 모든 것의 창조자로 정의하는 가부장적인 원인론에 의해 오랫동안 위협받고 '당황'해 왔다. 또한 그런 우주적인 작가만이 지상의 모든 작가에게 유일한 합법적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했다.
    요약)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 <실낙원>에 절망적으로 순종하는 '오독', 괴물로 변형된 이브 - '죄'
    에밀리 브로텐의 <폭풍의 언덕> : 밀턴을 과격하게 수정하는 '오독, 천국에서 지옥으로의 추락을 인습적인 신학이 '지옥'과 연관시키는 장소(언덕)에서 '천국'을 패러디한 장소(그레인지)로 추락하는 것으로 변형
    p366.
    '최초의 남성 우월주의자'인 밀턴이 여성들에게 전하는 명백한 이야기는 물론 여성의 부차성과 타자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어떻게 그 타자성이 가차없이 여성을 악마적인 분노, 죄, 타락으로 몰고 가는지, 신의 정원 (여성에게는 시의 정원이기도한 장소)에서 여성을 배제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p378.
    밀턴의 잘 알려진 여성 혐오가 고도로 발달한 철학적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에도 사탄, 이브, '죄' 사이의 연결, 병치, 이중성은 명확한 진술로 조심스레 설명되기보다 <실낙원>의 텍스트에 새겨진 어렴풋한 메시지로 전달된다. 그렇지만 '남성 우월적'이고 교부적이며 신 이원론적인 교회의 품 안에서 성장한 예민한 여성 독자에게 <실낙원> 같은 강력한 작품의 내용은, 숨어 있든 겉으로 명백히 드러나 있든, 상처를 줄 정도로 생생하다.
    p387.
    여성들은 가장 반항적일 경우엔 사탄, 가장 덜한 경우에 반항적인 이브, 그 밖에는 거의 항상 낭만주의 시인들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여성들이 밀턴의 수정본이 초래한 종말론적인 사회변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p391.
    왜냐하면 이브가 사탄의 분신일 뿐 아니라 '죄'의 분신이기도 하다면, 사탄과 이브의 관계는 사탄과 '죄'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즉, 사탄은 이브의 연인이자 아빠가 된다.

     

    7장 공포의 쌍둥이

    메리 셸리의 괴물 이브

    p403.
    밀터은 여자를 기껏해야 남에게 봉사하는 이차적 존재, 아이를 낳거나 아담의 사려깊은 안내에 따라 나뭇가지를 다듬는 참회하는 이브로 여긴다.
    p405.
    여기에서 도러시아의 현명해지고 싶은 소망이 남편과 동등해지고 싶다는 소망일 뿐 아니라 금지된 '남성적 지식의 영역, (...) 그로부터 모든 진리가 더욱더 진실되게 보일 수 있는 영역 속으로 침투하고 싶은 소망인 한, 그것은 사탄적인 것을 풍자하는 지적인 독립에 대한 열망이다.
    p409. 
    만일 도러시아의 열정적인 본성이 밀턴의 딸들이 처한 부정적인 역사를 논평하고 있다면, 캐저반의 둔감한 본성은 밀턴의 역사적 이미지를 더 강력하게 말한다.
    p412.
    첫 번째 선택은 <프랑켄슈타인>에서 메리 셸리가 취한 것이다. 메리 셸리는 <실낙원>에 나타난 남성적 문화의 신화를 그 가치 그대로 취해 그것이 내포한 모든 유비와 비교법을 포함해 그 의미를 해독하기 위해 <실낙원>을 다시 썼다. (중략) 
    이렇게 억제된 분노는 밀턴의 딸들의 두 번째 선택인 다시 쓰기를 감행한 여자들의 글의 표면에 (완전히는 아닐지라도) 떠오른다. 이 여성 작가들은 <실낙원>을 여성의 경험을 더 정확하게 비춰주는 거울로 만들기 위해 다시 쓰기를 선택한다. 

    (★) <프랑켄슈타인>을 읽어봐야지 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오며 가며 봤던 영화 포스터 속의 누더기 괴물의 모습만 기억되어서인지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다. 여성작가의 작품이란 사실도 놀랍고 (사실 작가보다는 캐릭터나 내용 자체가 충격이라서), 책에서 설명해주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해당 작품에 대해서 나 역시 편견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p446.
    <프랑켄슈타인>을 극으로 만든 초기에는 괴물을 연기했던 배우의 이름 옆에 빈 선을 그어놓은 것이 관례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명명할 수 없는 것에 이름을 짓기보다 차라리 이름 없는 방식이 오히려 낫다'고 메리 셸리는 논평했다. 그러나 뜻밖에 흡족했던 그녀의 반응은 정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름, 그리고 이름이 있는 존재의 사회적 합법성이 관계는 일생동안 메리 셸리의 의식을 사로잡았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p456.
    최후의 인간이 보인 적대적이며 아이러니한 문학적 제스처는 그 자신의 생애뿐만 아니라 그 작가의 생애도 해명해준다. 왜냐하면 역사 안에서 진정한 자리가 주어지지 않은 괴물의 마지막 복수가 역사의 말살인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메리 셸리가 나은 최초의 무시무시한 아이는 밀턴의 이브처럼 이 교훈을 처음부터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8장. 반대로 보기

    에밀리 브론테의 지옥의 바이블

    p458.
    셸리의 작품은 형이상학적 공포에 대한 수수께끼 같은 환상소설이고, 브론테의 작품은 형이상학적 정열에 대한 수수께기 같은 로맨스다. 
    p464.
    따라서 셸리가 밀턴을 비판한 사람의 딸이었다면, 브론테는 밀턴을 찬양하는 이의 딸이었다. 그러니 헤겔의 정/반의 법칙에 비추어보았을 때 셸리가 밀턴의 성 혐오적 이야기를 반복하고 재진술하는 길을 선택한 반면, 브론테는 그런 이야기를 수정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어울린다.
    p553.
    '죽음을 통해' 매기와 톰 털리버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들이 달성한 결합은 엘리엇이 그들을 위해 상상할 수 있는 것 중 유일하게 믿을 만한 결합이다. 왜냐하면 삶에서 매기는 단념의 천사가 되었고, 톰은 근면의 단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문화의 풍경 절반을 휩쓸어버리는 홍수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처럼 여성적인 자연은 저항하고 있으며 계속 저항할 것이다.
    p485.
    그러나 브론테는 역사의 관점에서 전체성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꿈이 진정으로 실현되는 순간이 나타날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기를 바란다. 또한 지금까지의 가부장적인 여성 혐오적 권력을 감안한다면, 전체성의 실현이 낙원이 되기도 하겠지만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슬픈 깨달음을 브론테는 전하려고 한다.
    p500.
    에밀리 브론테가 교육을 항상 공포스럽고 심지어 고통스러운 것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성직자 딸들의 학교'와 그 밖의 곳에서 겪었던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교육에 대한 브론테의 묘사는 19세기 교육이 젊은 아가씨에게 억압적이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 요즘 자주 보여지는 성별간 혐오, 데이트 폭력/살인 등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를 볼 때면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나 싶다. 특히, 페미니스트=쌈닭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일부 여성 혐오의 사람들을 볼 때며, 단시 성별이 아니라 불평등에 대해 말하는 일종의 피해자가 마치 잘못을 한 것이라고 말하는 기분이 든다. 물론, 과한 여성주의를 가진 분들 때문에 일부 부정적 이미지가 씌여질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일부를 전체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닐까? 그리고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이런 부정적 여성의 이미지가 과거에는 괴물이나 악마의 프레임을 씌웠던 것을 보고 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Omniscient P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