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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6. 내가 죽고 싶다고 하자 삶이 농담을 시작했다
    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3. 19. 23:20

    김현진

    p14. 
    죽으려다 못 죽으면 못죽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구차하고도 구차한 삶이여.
    p23.
    언제나 삶에 뭔가 즐거운 일을 만들려고 쉴 새 없이 도모하고 재미나게 살기 위해 온갖 짓을 다하다가 종종 사고까지 치던 나였다. 그런 내게서 생명력이 점점 빠져 나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것은, 할머니를 암으로 조금씩 잃어가던 과정을 지켜보았을 때와 조금은 비슷한 기분이었다.
    p28.
    우울증이란 놈은 관심을 너무 주면 내 모든 것이 죄다 제 것인양 설쳐대고, 관심을 너무 안 주면 나 여기 있으니 좀 알아달라고 발악을 하다 기어코 뭔가 사고를 치고 만다. 별수 없이 고속버스 옆 자리에 함께 앉아 가게 된 그다지 친하지 않은 친구처럼,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이 녀석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 녀석에게 휴게소에서 산 호두과자라도 어색하게 권하게 된다. 녀석을 눌러 없애려 하지도 않고 맹렬하게 미워하지도 않고, 그냥 '내 옆자리에 누가 있나 보다'하며 창밖 경치도 보고 책도 읽고 그러다보면 녀석도 어느새 조용해져 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갈 것이다.
    p35.
    걷기는 그전에도 많이 하던 거였느데, 달리기는 뭔가 달랐다. 뭐랄까,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풍선에 약간 여유를 주듯이 어꺠의 힘이 조금 빠지게 된다. 분하고, 화나고, 속상한 부정적인 기분들이 달리면서 뱉어 내는 숨에 울분과 함께 빠져나가는 듯 하다. 그전에도 우울증에 달리기가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정말 효과가 있었다.
    p53.
    남성이 먹는 약들에 대해서는 온갖 실험 결과나 뉴스가 나오는 데 반해 고통을 호소하는 여성에게는 '그것 하나도 못 참냐'는 식으로 대하고 심지어 부작용까지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느다. 아마 의사도 피임기구 부작용에 대해 알지 못하고, 모르니까 관심도 더 없는 게 아닐까. 어떻게 그렇게 쉽게 여성의 몸을 대하는 게 가능한 걸까? 왜, 대체 왜일까?
    p84.
    거절이라면 충분히 당해봤다. 수십 수백 번 당해봤던 것이다. 그 거절들이야말로 나를 지탱하고 있는 힘이다.
    p196.
    저축을 몽땅 털리는 생활은 이후 내게 20년간 계속 되었고 그에 대해서는 별 유감이 없으나, 자기 손으로 정직하게 돈 버는 노동의 맛을 몰랐던 아버지의 생이 이제서야 안쓰럽다 노동의 맛을 모르면 겁쟁이가 되고, 겁이 많으면 자연스레 나약해지기 마련이니까.
    p206.
    정말로 우울증이 깊으면 숨 쉴 힘도 남지 않게 된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죽을 힘 밖에 안 남게 된다.
    p214.
    "우울증이 나를 흠씬 패던 시절"이라는 말답게,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p222.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족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나도 이제는 생각하게 되었다. (중략) 이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자리 잡지 못하고 부레옥잠처럼 둥둥 떠다니는 인생이지만, 이 빚을 꼭 일부라도 갚고 싶다. 부디 기다려주세요, 나의 사랑하는 채권자들이여.

     

    (★)
    사람마다 힘들어지는 시기는 반드시 온다고 본다. 지금 내가 힘든 것처럼 그 누군가들도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힘든 순간이 오겠지. 한가지 걱정은 옆에 있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나의 힘들어함에 같이 물들지 않기를, 그리고 그들은 적어도 우울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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