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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탑승을 시작하겠습니다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3. 13. 19:17
정미진
<환희를 찾아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p11.
짐으로 꽉 찬 방에 있으면 달팽이 껍질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언제인가부터 자신이 껍질을 짊어진 것인지, 껍질에 붙어 기생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렸다. 그마저도 다달이 사용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언제 벗겨질지 모를 일. 그래서인지 월세날이 다가오면 악몽을 꿨다. 월세를 내지 못해 껍질이 벗겨진 채 내 쫓겨, 양 더듬이로 맨 몸뚱이를 가리려 애쓰는 꿈이었다.p13.
대체 '환희'에 찬 기분이 어떤 걸까.
숨이차도록 웃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했다.p14.
사회적으로 설정된 허들을 넘기에 그녀가 가진 숫자는 턱없이 모자랐고, 수치가 아닌 감성만으로 버티기에는, 감성을 자극할만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트린> 베트남 달랏
p56.
아이들이 뿜어내는 충만한 에너지는 한 발자국 떨어져 볼 때는 탐스럽기 그지 없었다. 허나 그들을 책임지고 끌어주는 존재가 되고보니 그만큼 세상 버겁고 부담스러운게 없었다.<고양이 소년> 터키 보드룸
p113.
'버틴다'
버틴 뒤에 무엇이 남을까.<Merci (메르시)> 프랑스 파리
p142
그저 평범한 남자와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첫 아이가 태어나고 내 인생은 평범과는 거리가 멀겠구나 싶었다. 아이는 발달 장애를 앓았다.p143.
집 안에서는 아이와, 밖에서는 세상의 적의와 싸우며 하루는 울고 하루는 화를 내고 하루는 포기했다. 그렇게 밀리지도 않고 하루하루가 쌓여 아이는 스무살이 되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지만 나에게 아이의 성장은 훈장과도 같았다.<서핑 보호 구역 > 포르투갈 에리세이라(Ericeira)
p168.
너도 알다시피 여기 생활은 단순하잖아. (중략) 생활이 단순해져서 좋은 건 잡생각이 안 든다는 거야.p172.
사실 파도를 잘 못 타겠어. 다치고 나니까 겁이 나서. 한번 겁이 나기 시작하니까 물에 들어가는 것도 무서워졌어. '두려움'이 생긴 거야. 포르투갈까지 왔는데 제대로 파도 한번 타보지도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더해져서 자괴감도 밀려왔지. 파도처럼 끝도 없이 부정적인 생각들이 밀려왔어.<개를 끼고> 태국 방콕
p209.
힘이 없어 늘어진 개를 안고 아기 달래듯 머리부터 등허리까지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작은 놈의 온기가 닿아 가슴팍이 따뜻해졌다. 아내가 품에 안겨서 숨을 쉬면 이렇게 가슴이 따뜻해졌더랬다. 그 온기에 두렵던 마음이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개가 가면 이제 나도 갈 수 있겠구나. 나도 가도 되겠구나.p211.
아내가 떠난 뒤 나는 마음만 먹으면 떠날 준비를 했다. 나 하나 없어진다 해서 아쉽다 할 사람 하나 없으니 되레 산뜻했고.p213.
이 여행이 내 생애 최초의 자발적 도전이었다. 늙은 개를 데리고 늙은 몸을 이끌고, 아내가 그토록 하고 싶어 하던 여행을 하는 것.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도전이리라.<싫다고 해도 굳이> 한국 인천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작가의 말
p248.
그 어떤 일보다 여행은 내게 외로움을 확실하고 선명하게 선사한다.p250.
지금껏 나에게 여행이란 정해둔 길에서 벗어나 경로를 이탈하는 행위였다.(★)
여행은 현실과 분리되는 존재인 나에게, 책 속의 인물들의 여행에 공감하며 나 역시 여행을 떠나본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들의 불빛 속에서 외로움을 처절하게 느꼈던 순간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외로움조차 버거운 상황이라 엄두를 못내고 있다. 겁없이 훌쩍 떠났던 내 젊은 날이 그리워지는 순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