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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5. 4. 21. 10:25
최은영
* 문학동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p16.
마치 카세트 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책을 읽는 동안 그녀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p17.
'나는 홀로 몰두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잘 했다. 몰두하면 시간이 가고, 시간이 가면 그곳으로부터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걸 알았으니까.'p41.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다음 문장이 어떻게 완성되었을지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어떤 문장이든, 그녀는 내가 자신보다 나은 경험을 하기를, 자신이 겪었던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자존심이자 힘이었으리라는 생각도 한다. 자신의 조건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겪는 부당함을 인지하면서도 인정은 하지 않으려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 마음이 그녀를 지켜주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동의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는 마음이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p42.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떠나게 된 숱한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까. 이 질문에 나는 온전한 긍정도, 온전한 부정도 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p44.
겨울은 사람의 숨이 눈으로 보이는 유일한 계절이니까.(★) 늦은 나이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유사한 경험의 누군가를 만나면서 용기를 얻게 되고, 동질감 속에서 위안을 얻게 된다.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다고 말만하고 있는 나 역시, 나와 비슷한 누군가 조금 앞서서 걷고 있다면 힘을 내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을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가 없다고 하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으니까.
몫
p48.
그대로라는 말이 거짓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대로라고 말하는 것은 그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예전의 당신이 존재한다고, 그 사실이 내 눈에 보인다고 서로에게 일러주는 일에 가까웠다.p49.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번재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구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각자의 영역(몫)이 있을 것이다. 여성 문제를 다루고 싶었던 희영, 결혼 이후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한 정윤, 어쩌면 화자는 그 둘의 중간 즈음이 아닐까 싶다.
일년
p86.
어릴 때 그녀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발명될 미래에 대해 들었다. 그때 그녀는 하늘은 구름과 새의 집이 되어야 한다고 , 그렇게 어지러운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p104.
그녀는 그런 상황을 체념한 채로, 그 모든 일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졌고, 그녀는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p120.
그녀는 여전히 그녀인 채로 살아 있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간극. 동고동락 속에서 가까워진 사이도 이 차이 속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건, 우리가 느끼는 자격지심과 이해의 한계 등등의 문제 때문이 아닐까.
답신
p123.
상처가 나도 금방 회복할 수 있는, 살아온 모든 시간을 망각 속에 던져버릴 수 있는 나이에 나는 너를 떠나보냈구나.p128.
나는 절대로, 절대로 누군가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p144.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 하는 것.
그게 우리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었던 거야.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결정적으로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이기도 했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야. 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들쑤셔봤자 문제만 더 커질 뿐이라고.p154.
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떤 모습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갈까.(★) 나의 메모에는 형부 개같은, 아니 개만도 못한...이라 적혀 있다. 그런데 누군가의 후기에는 화자가 자기 입장에서 말한 것이고, 형부나 언니는 다르게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싶단 글을 읽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빼앗긴 언니라는 강박에 화자가 그랬을지도. 이러고 보니 앞선 화자들의 반대편의 사람들의 기억에는 또 다른 화자들의 관점에서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겠구나 하나는 생각이 든다.
파종
p195.
오빠. 믿지는 않지만 그런 게 있다면......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여기 더는 머무르지마. 그냥, 다 잊고 멀리 가버려. 이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마.(★) 가족을 떠나보내고 나서 괜찮아지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리움. 가끔 꿈에라도 나타나면 반가우면서도 혹 좋은 곳에 가지 못한 것은 아닌가 걱정도 되고...
이모에게
p211.
"희진이 네가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넌 여자애야.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이 널 두려워하게 하는 편이 훨씬 좋은 거야."(★) 처음에는 답신의 다른 버전(?)일까 기대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조금은 냉정하고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모 이야기이니...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p293.
엉터리. 엉터리. 기남은 종종 엉터리라고 중얼거렸다 무엇을 향해 그렇게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습관이 되어 소리 내어 말했다. 엉터리.p300.
그 어설픈 관심이 기남의 오래된 상처를 헤집고 일상의 평화를 침해했다는 것을 그녀는 끝끝내 몰랐을까. 기남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은 그래도 기남보다 나음을 확인하고자 했던 걸까. 기남은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p313.
"너무 다정한 건 나쁜 거래요."(★) 홍콩에 사는 딸을 찾아가는데... 딸과 사위는 무뚝뚝해보이는데 그들의 자신인 마이클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이의 서툰 질문들은 어른들을 참 부끄럽게 만드는 것 같다.
해설. 더 가보고 싶어 / 양경언(문학평론가)
p319.
최은영의 여성은 '읽는 행위'를 통해 개인의 불운으로 여기기 쉬운 일들을 사회구조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시야를 얻음으로써 삶을 쉽게 등지지 않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p320.
다시 말해 해진은 어떤 글은 특정 사안을 제대로 직시하게 만든다는 점, 그런 글은 흔히 누군가 '재수가 없어서' 겪는 일로 다뤄졌던 사안을 사회가 해결해야 할 사안이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즉 모두의 문제로 바라보게 해준다는 점, 무엇보다 글을 매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 가는 것이다. <몫>에서 읽기 장면은 발화할 수 있는 권력이 편재되어 있는 지금 사회의 모습을 독자의 위치에 선 한 사람이 인지해가는 과정을 그리는 한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읽는 사람'은 결국 '쓰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해진은 '보이지 않는 잉크'로 새겨진 세상의 일들을 몸으로 직접 이해해나감으로써 세상이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잉크를 꺼내드는 사람으로 변화한다.p321.
<몫>의 인물들은 자신을 이루는 다양한 정체성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이 설령 자기 자신을 깎아내린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스스로가 어던 목소리를 내려 하는지, 자신의 '몫'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읽기 경험이란 자기 혐오를 극복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정치적 행위이다.p327.
소설을 참고 견디는 방식만이,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부정의한 상황을 용인한 스스로를 벌하는 방식만이 폭력의 세계를 살아내는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에겐 참지 않는 방식도 있다. 폭력을 참아내지 않기로 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을 돌아볼 줄 알고, 책임을 다해 함께 있는 이들을 돌보고자 한다. 자신의 삶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들의 삶을 존중하는 힘을 가진다.p331.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다른 이를 필요로 하고 동시에 다른 이에게 필요한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돌봄은 이를 인식하게 하는 활동이자, 실제로 사람을 사람답게 살려내는 행위이다.p336.
더 가보고 싶어하는 마음, 바로 거기에서부터 다른 잉크로 세상을 쓰는 일이 이어질 수 있다고.작가의 말
p338.
소설을 쓰면서 잊힌 기억이 살아날 때, 나는 나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