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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 고통 구경하는 사회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10. 25. 10:00
김인정
들어가며. 고통을 보여주는 일
p9.
혈관과 내장까지 깊게 벌거벗겨지고 있는 인간의 몸이 징그럽지 않았다. 슬펐다. 축 늘어져 분해된 시신은 산 사람의 시선까지 감당해야 했다. 내가 보는 것이 옳은가, 누군가의 부검을 대학생 인턴 기자가 실습 커리큘럼으로 소화하는 게 맞나 싶었다. 볼 권리나 볼 자격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눈으로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p11.
고통의 목격을 묻는 일은 차라리 수월했다. 고통의 당사자 앞에서 마이크와 카메라를 움직이는 일은 훨씬 곤혹스러웠다.p12.
그러나 동의를 얻어 고통의 장면을 찍고 편집해 송출해 보았자 고통을 암시하는 클리셰한 이미지와 나의 성긴 문장 사이로 고통은 자주, 줄줄 새어나갔다.p14.
어떤 고통을 보여줄 수 없는지에 대한 논쟁 밑으로는, 고통을 스펙터클하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뿌리깊게 흐르고 있다.1장. 새롭고 특별한 고통이 여기 있습니다
좋아요와 리트윗, 그 이상
p24.
목격은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이고, 구경은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일이다. 둘 다 보는 일이지만 목격이 가치 중립적이라면, 구경할 때 눈은 흥밋거리와 관심 거리를 찾는다.p28.
'아무것도 하지 않는 카메라'에 관한 오랜 공포가 있다. 찍고 있지만 상황을 냉담하게 기록할 뿐, 상황을 개선하지 않는 카메라다.p32.
타인의 고통을 소비했다는 죄의식은 대개 모격ㄱ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다.p36.
나의 시선이 구경이 될 수 있다는 걱정에 빠져서 고통을 보는 일 자체를 멈춘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인간성 실패의 시작일 것이다. 우리의 눈은 움직일 수 있다. 자랑스럽지 않은 이유로 머물렀다고 하더라도 더 나은 곳으로 분명히 이동할 수 있다. 본 뒤에 무엇을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전달과 전달, 중개와 중개를 통해 유예되어 버린 행동의 가능성이 당신에게 있으니까.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p39.
하나의 뉴스가 탄생하여 우리의 타임 라인에 흘러드는 과정에는 다양한 맥락과 관점,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그 과정은 깔끔히 감춰진 채 편집의 결과물만이 스크린을 채운다.p43.
뉴스는 거의 늘 광고 시장과 긴밀하거나 느슨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저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이 관계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p53.
각자의 확증편향 안에서 모은 정보를 기반으로 한 선택적 연민과 나르시시즘의 끝은 폭력이었다.뉴스가 끝난 뒤에 시작되는 것
p59.
언론이 여론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상호적이고 분리하기 어렵다. 언론은 여론을 읽는다. 언론은 여론에 등떠밀리거나, 이미 존재하는 여론을 반영한다. 거꾸로는 언론 스스로 여론을 형성하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p67.
'돌이킬 수 없는 피해'. 끝내 공개된 피의자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단어다. 피의자에게 하는 말은 아니다.p68.
얼굴을 응시하다가, 나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피해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온다. 신상 공개의 패턴에 다다르기까지 필요충분조건처럼 거기에 있는 건 피해자들의 돌이킬 수 없는 피해다. 그 피해에는 이유가 없다. 피해자의 탓인 부분이 없다. 그런데도 돌이킬 수없다. 없던 일로 돌이킬 수가 없다.p69.
실제 양형과 국민의 법 감정이 크게 어긋나는 경우에는 범죄자의 명예와 평판을 실추시키는 것만이 현실적인 해결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개인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 방향을 틀어야 한다. 범죄가 일어나도록 방조하는 사회 구조는 물론이거니와 얼굴 공개라도 하지 않으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하는 사법 시스템을 가리켜야 한다.2장.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날씨는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거짓말
p79.
지금 일어나는 위험을 알리고, 경고하고, 서로가 안전하도록 다 함께 지켜보는 일은 공동체 사회에서 무척 중요한 기능이다. 공동선의 영역이기도 하다.p89.
오늘의 문제를 계속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뉴스는, 그리하여 태생적으로 근시안이다. 뉴스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라 인간을 닮았다. 보이는 걸 보이는 대로 보다가 자칫하면 주류의 시각을 답습한다.재해는 어떻게 문화가 되었는가
p94.
문제는 산업재해라는 고통의 흔함이다.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되어 사회 안에 천연덕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p96.
뉴스를 전달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지면과 화면에 잘 옮겨진 타인의 고통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사이에 '보여줄 수 없는 고통'과 '보이지 않는 고통'은 상대적으로 소외된다.p100.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산업재해 통계에 따르면 여전히 하루에 6명이 넘는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다.아픔이 혐오가 될 때
p111.
너무나도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그보다 전형적인 건 가해자의 행태이니, 적어도 피해자의 전형성을 견뎌야 할 책임이 언론에 있다고 믿기에 망설임 없이 그 모습을 포착하게 된다.빈곤 포르노를 넘어, 개인의 고통에 대한 사회의 책임
p119.
'대체로 다 이런' 풍경은 비슷하게 닮아 있었다.p124.
쉬는 걸 보이지 않아야 쉴 수 잇는 사람들이 있다.어떤 이야기는 이름을 갖지 못한다
p132.
다만 약자들의 선행이 뉴스가 될 때는, 이들이 약자라는 부분에 뉴스 가치가 실린다. 약자라는 점이 필요 이상으로 강조될 때도 있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공동체의 도덕심을 환기하는 역할까지 약자들에게 과다 부여된 것은 아닌가 하는 노파심에서 온다.3장. 나와 닮지 않은 이들의 아픔
우리가 알고리즘 밖으로 나올 수 있다면
p146.
이 열없는 고백은, 비유의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불쾌하고 불편하게 만든다. 공감을 위해 닮음이라는 교두보를 찾아내려는 시도였다한들 도리어 밀어내기와 배타성이라는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이유고, 편견과 한계를 노출하며 자주 무너지는 까닭이다.* <공감의 배신>, 폴 블룸
p152.
윤리적으로 가장 안전해 보이는 답변은 "모든 고통이 중요하고, 골고루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이건 동시에 지적으로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심지어 비겁하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게 들리기도 했다.p154.
알고리즘과 구독에 갇힌 나의 타임라인 밖으로 빠져나와 다른 삶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p155.
어쩌면 오늘날의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건, 나와 닮지 않은 것들, 나와 전혀 닮지 않은 것들을 향한, 닮음을 넘어 다름과 접속하는 공감이 가능한 믿음 아닐까.트리거 워닝
p167.
보여주기의 윤리와 보여주지 않기의 윤리는 누구를 지키는 것이며 누구를 위한, 향한 것인가?고통의 현지화가 필요할 때
p175.
마음이 긁히는 이유는, 고통의 물리적 거리감이 심리적 거리감으로 이어지는 일이 내 안에서도 빈번해서였다. 마음을 쓰다가도 눈에서 멀어지면 무심해지기 일쑤여서 였다.지역에서 유독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이유
p194.
수도권 과밀화와 서울 집권화가 지역의 정보에 무관심한 현상을 부추기고, 정보와 여론의 불균형은 다시금 지역을 소외시키고 서울 집권화를 공고하게 만든다. 지역의 고립은 지방자치에 대한 감시 같은 외부 시선이 필요한 영역을 느슨하게 한다.만들어진 전쟁, 젠더 갈등
p201.
언론이 한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은 다양한 요소를 통해 발각되곤 하지만, 어떠한 어휘를 선택하는가는 그중에서도 언론의 시각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잣대다.p208.
언론에 성별이 있다면 무엇인가.4장. 세계의 뒷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그저 뉴스거리로 끝나는 많은 일들
* <타인의 고통>
p225.
난무하는 폭력의 이미지 안에서 무기력해지는 건 이미 시대의 기본값이 되었다고, 여전히 더 센 것을 보여줘서라도 그 둔감함을 자극하려는 세태가 이어지고 있다고 그 안에서 기자나 독자 둘 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 단속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뉴스가 왜 만들어지고, 뉴스를 왜 보고 있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선.연민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고 해도
p238.
일상을 살아가며 연민을 잊지 않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균형과 전환 사이에서 기이한 파열음이 나는 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라는 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반응 속에서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화학 작용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언어, 계급, 인종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언어
p250.
돌이켜보면 공감이라는 영역에 접어들기 전에 너무나 많은 장벽이 존재한다.사적 애도를 위한 공적 애도
p258.
애도에는 죽음과 상실이 앞선다. 상실이라는 구멍은, 우리가 가졌다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기호다. 또한 우리가 욕망하고 바라왔던 것, 가졌다고 상상한 것이 무엇인지를 비추는 어둑한 거울과도 같았다.p261.
제대로 슬퍼하려면 기억을 나누어야 하고, 필요한 만큼 충분히 오래 슬퍼하려면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나가며. 영원히 움직이는 텍스트
p267.
누군가 고치기도 하고 보아주기도 하는, 움직일 수 있는 텍스트. 이런 작업은 사람을 안심시키고 용감하게 하는 성질이 있었고, 이와 같은 경험은 내 손에서 떨어져 나간 텍스트가 영원히 움직였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도록 했다.(★)
어느 새벽, 나는 윗집 남자의 요란한 발걸음과 문쾅, 그리고 이어지는 화장실 소음에 잠을 깼지만 한편으로 갑자기 천둥 치듯 들리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휴대폰으로 속보를 확인하니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가 있었고, 긴급하게 서울 내 병원 응급실로 환자를 이송 중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어떤 식으로 사건이 일어난 건지 궁금한 마음에 사진 기사를 찾아봤다. 모자이크로 처리 되었지만 정말 겹겹이 쌓인 사람들의 모습은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다. 그리고 한편으로 반대 편에는 긴급 구호를 하는 모습과 이를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상반된 모습도 찾아볼 수 있었다.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진이나 영상을 더이상 보지 못했고, 그저 얼마의 생존자들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글로 쓰여진 기사만 찾아서 읽게 됐다.
대참사라는 말은 우리가 종종 하게 되는 말이긴 하다. 그리고 어쩌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고 지금 무슨 상황인지 궁금해서 찾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나처럼 차마 더 보지 못하고 중단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목적이 어찌됐든 더 적나라한 것들을 찾아서 확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제는 타인의 고통마저 소비되는 자본주의 시대를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어느 드라마에서는 행복을 손쉽게 찾는 방법이 내 주변인을 괴롭혀 그들이 고통에 빠진 모습을 보는 것이라는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극중 인물의 대사가 나오기도 했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우리는 저보다는 낫지 하는 그런 마음을 갖는 것 역시 좋지만은 않은 생각이지 않을까...
그리고 간접적이긴 하지만 내가 일을 하면서 불편했던 나의 마음에 대한 이유도 한가지 찾게 되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부추겨 무언가 소비하도록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떨어뜨린 빵조각을 찾아서 어떤 메시지에 반응하는지, 그래서 우리라고 포장된 회사의 다양한 형태의 상품을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일. 먹고 살기 위한 일이긴 하지만 이왕이면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의 현실은 그런 소비를 유도하는 미디어와 함께 하루를 보내는 그저 좋게 말하면 은퇴자, 나쁘게 말하면 백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