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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4. 반통의 물
    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7. 25. 14:49

    나희덕 (시인)

     

    P5.
    소가 자기도 모르게 내는 울음소리가 시라면, 산문은 삶이라는 뻣센 지푸라기를 씹고 도 씹는 되새김질 같은 거라고 생각해왔다.
    P7.그래서 이 책 속에는 ‘질문들’은 있지만 ‘대답들’은 없고 ‘순간들’은 있지만 ‘보루들’은 없다. 그 대신 나를 지나간, 또는 내가 지나온 ‘나무들’과 ‘사람들’이 있다. 고단한 삶 속에 혼자 내던져진 것 같았던 날들도 실은 그들이 베푸는 그늘 아래 있었음을 이제야 느낀다. 그 나무들과 사람들에게 이 모자란 책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제 1부. 순간들

    일몰 무렵

    P14.
    죽음에 대한 의식이 없어도 죽음을 체험할 수 있고, 삶을 다 겪지 않고도 삶의 조건들에 대해 체득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P15.
    시간의 ‘밖’에서 시간을 바라본다는 것, 그 자유가 우리에게 허락하는 것은 시간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에 대한 수용이다. 

     

    반통의 물

    P18.
    밭을 처음 고르기 시작할 때부터 손으로 돌맹이를 수없이 골라내어 고랑 밖으로 던졌지만, 실은 내 마음 속에 그렇게 내던질 것드링 많았던 탓이다. 그러는 동안 내 안에도 어느새 푸른 것들이 자라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존재의 테이블

    P31.
    그 테이블을 사지 않고도, 이미 집에 있는 테이블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존재의 자리를 나는 애 그 테이블이 아니면 안될 것처럼 생각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자기 존재의 자리를 잃어버린 채 생활에 휘둘려 살아가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큰 집을 가졌다 해도 그 속에 정작 존재의 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보다는 덜 우매해지려는 욕심에서였을 것이다.
    P32.
    행복하면 그 짧은 행복을 즐기느라, 고통스러우면 그 지루한 고통에 진절머리를 치느라 그 앞에 가 앉지 못했다. ‘존재의 테이블’을 장만한 뒤에도 존재의 자리는 쉬이 생기지 않았다. 

     

    점자들 속으로

    P35.
    그러면서 나는 절감헀다. 빛에 익숙해진 눈으로 누군가의 어둠을 이해한다는 일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를. 손 끝이 눈동자처럼 예민해지기까지 그들이 얼마나 암흑 속에서 발버둥쳐야 했는지를. 그 칠흑 같은 암흑을 제대로 겪어보지도 못하고 그들의 언어를 읽으려 했던 나의 시도가 얼마나 오만에 찬 것이었는지를. 끝내 나는 눈으로 읽는 자였던 것이다.

     

    북향 언덕의 토끼

    (★) 작가님 본인이 보육원 출신이라는 고백

    P40.
    어느 해처럼 겨울은 지나갔으나 겨울을 뼈저리게 겪어낸 이는 많지 않았다. 봄은 왔지만 그 소리없는 변화를 느끼기 어려운 불감증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실수

    P45.
    결국 실수는 삶과 정신의 여백에 해당한다. 그 여백마저 없다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어떻게 숨을 돌리며 살 수 있겠는가. 그리고 발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어떻게 휩쓸려 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어쩌면 사람을 키우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실수의 힘일지도 모른다.

     

    이름이라는 것

    P50.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는 일이다. 그러므로 책임을 동반하지 않은 관계 또한 현실적 실감을 획득하기는 어렵다. 이름의 무게를 덜어낸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의 무게를 덜어낸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골목에 있다.

    P57.
    현대문명이 모든 골목을 사라져버리게 한 뒤에라도, 시인은 그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억하고 복원해야 할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 
    P57.
    내가 밟고 가는 현실과 내가 안고 가는 기억, 그 사이에 문학은 있다. 내가 몸을 실은 속도와 그것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속도, 그 불안정함, 그 불협화음에 시는 간신히 있다.

     

    제 2부. 나무들

    내가 잃어버린 나무들

    P62.
    이처럼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당장 자기가 무엇을 얻고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먼 훗날의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나무를 가꾸는 동안의 수고로움 역시 그 아름다움이 굳이 자기의 것이 아니어도 좋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사람이 나무보다 아름다워지는 때가 있다면 바로 그런 순간일 것이다. 
    P65.
    내가 떠나온 집. 내가 잃어버린 나무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나보다 더 오래 그 자리에 남아 햇빛을 향해 몸을 기울일 것이다.

     

    내 유년의 울타리는 탱자나무였다.

    P69.
    실제로 너무 아름답거나 너무 부유하거나 너무 강하거나 너무 재능이 많은 것이 오히려 삶을 망가뜨리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사람에게 주어진 고통, 그 날카로운 가시야말로 그를 참으로 겸허하게 만들어줄 선물일 수도 있다. 그리고 뽑혀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가시야말로 우리가 더 깊이 끌어안고 살아야 할 존재인지도 모른다.

     

    새장 속의 동백꽃

    P73.
    날기를 멈춘 새는 더 이상 새가 아니듯이 아무도 꿀을 따가거나 꽃가루를 옮겨주지 않는 꽃도 이미 꽃이 아니다. 새장 속에서 자유를 잃어버린 채 하루하루 생명력을 소진하며 시들어가는 그 꽃새를 바라보면서 내 자신의 삶이, 그리고 도시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삶이 저 살아 있는 박제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우주

    P76.
    자연은 아무에게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지. 오래 기다리며 지켜보는 자에게만, 몸을 낮추고 귀를 기울이는 자에게만 그 신비의 베일을 조금씩 벗겨주니까 말야.

     

    솔잎혹파리처럼

    P82.
    심지어 인간의 손이란 배고프지 않아도 그 위력을 발휘하곤 한다.

     

    그는 새벽 다섯시에 온다.

    P86.
    자연이 원래 우리에게 밤을 준 것은 휴식과 충전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배회와 소비의 밤을 보내고 난 이들에게서 어떻게 새벽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마땅히 어두워야 하는 밤으로부터 어둠을 빼앗는 것은 명백한 자연 파괴다.

     

    나와 루쉰과 고양이

    P91.
    그러나 부끄럽게도 나는 더 이상 먹이를 내어주지 못했다. 먹이를 주는 것이 아깝거나 귀찮아서가 아니었다. 고양이에 대한 거의 생래적인 거부감을 걷어내기가 어려웠고, 어떤 존재를 길들인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더 자주 더 많이 찾아올까봐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책무감에서 고개를 돌려버린 것이다. 겨우내 그 울음소리는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어떤 소리가 되고 말았다.

     

    모세상의 흠집

    P96.
    우리는 지켜보아야 하리라. 인간에게 불가능이 사라져가고, 그리하여 참된 존재의 증거인 절망마저 잃어가고 있음을 오래오래 애석해하면서.

     

    속도, 그 수레바퀴 밑에서

    P105.
    내 한몸 쉴 그늘을 찾아다니며 살아왔을 뿐 스스로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주지 못한 내 모습이 거기서는 잘 보였다. 그동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이리저리 그날만 찾아다녔을 뿐 제 뿌리와 그늘을 갖지 못해서라는 걸 뒤늦게야 깨닫게 된다.
    P107.
    반성하지 않는 세계, 속도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절망 조차도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는 한계에 갇혀 있다는 것. 우리 자신이 이미 그 속도와 닮아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나이테를 잃어버린 저 가난한 가로수들과 더불어 우리가 나누어야 할 절망의 내용이 아닐까.

     

    제 3부 사람들

    가자미와 신호등과 칫솔과 유릿조각

    P113. <누예의 방> 중 
    글을 쓰고 싶어하셨지만 
    글자만을 한 자 한 자 철필로 새겨 넣던 아버지,

    (★) 작가가 집안 형편 때문에 일시적으로 보육원에 맡겨졌다고 생각했는데, 부모님이 보육원에서 일을 하셨던 것이었다.

    P119.
    지는 해를 등지고 걸어가는 우리 앞에는 긴 그립자 둘이 우리보다 한발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해가 진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그날 나는 삶의 저녁에 다다른 어머니아 함께 걸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여름이여 조금 천천히 천천히 와다오.

     

    오래된 내복처럼 우리는

    P126.
    젊음을 ‘시힘’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함께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식솔이 다 되었다. 마치 오래된 내복처럼 서로를 껴입고.
    P128.
    원래 시인의 자리는 주변부니까. 주변부야말로 세상을 눈여겨보기 좋은 자리이고, 이룰 수 없는 꿈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그리고 끝까지 꿀 수 있는 자리니까.

     

    그곳에 무등이 있었다.

    P137.
    그래서 무등산은 그곳을 오르는 사람에 따라 아주 높은 산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낮은 산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 불켜진 창으로

    P139.
    문학이란 대체로 이 세상에 방목되고 있는 불행이라는 말을 타고 가장 궁벽진 곳까지 스스로를 몰아간 자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행복을 알아볼 수 잇는 눈은 잊어버리고, 스스로의 불행을 문학의 식량으로 삼으면서 야위어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때도 있다.

     

    햇볕과 비

    P149.
    햇빛이 들면 눈물을 내어 말리고, 비가 내리면 눈물을 빗물에 흘려보내며 살아온 그녀. 그 푸른 오동나무를 떠나오면서 나는 그녀가 끊임없이 피워올리는 웃음 뒤에 출렁거리는 강 하나를 데리고 왔다.

     

    산골 아이 영미

    P155.
    때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손이 되어주고, 때로는 다리가 되어주면서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다른 사람 하루 할 것을 자신들은 하루 반은 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영미 남매가 이렇게 밝고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는 것도 부모들의 자신감있는 생활태도 덕분일 것이다.

     

    연표화할 수 없는 향기

    P157.
    한 해의 마지막날과 이듬해의 첫날은 그저 어제에서 오늘로의 평범하고 무심한 지속일 뿐이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무언가 새로워지고 변화되기를 갈망하지만, 그 새로움이란 게 달력이 날짜에 맞춰 오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제 4부. 질문들

    누가 저 배를 데려올 것인가

    P166.
    누가 저 배를 데려올 것인가. 저는 그 배가 제 자신인 줄도 모르고 안타까워하면서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중략)
    어느날 저는 그가 누구인기지를 알게 되었지요. 그 배를 끌어올 사람, 그는 바로 시간이라는 것을요.
    (중략)
    시간은 우리를 가두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합니다. 우리를 쓰러뜨리기도 하고 일으켜세우기도 하는 것 역시 시간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토록 갇히지 않았다면 열림의 순간이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쓰러지지 않았다면 일어설 수도 없었으리라는 생각 또한 듭니다.

     

    이 때늦은 질문

    P172.
    이제 와 깨닫는다, 김남주 선생의 말은 회한이 아니라 충고였다는 것을.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말라는 말은 시대를 벗어던지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탕진시키기 전에 스스로를 온전히 불태우라는 권유였다는 것을.

     

    두마리 새에 대한 단상

    P179.
    시인은 응시하는 자이며, 노래하는 자이며, 그 응시와 노래로써 스스로를 넘어서려는 존재들이다. 천상과 지상을 향한 그 두마리 새는 삶과 죽음 사이의 강한 모순과 고통 속에서 불사조를 꿈꾼다.

     

    니체에 관한 오해

    P183.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위험함’이 아니라 그 위험이 얼마나 창조적인가 파괴적인가 하는 것이며, 위험함을 거넌지 않고서는 진실로 겸손해질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책 밖으로 걸어나갈 수 있는 자유

    P192.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읽어대고 써대는 것도 일종의 욕망 아닌지, 그 욕망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지치고 상처입은 것인지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읽는 일 못지 않게 읽는 것을 멈추는 일의 중요성을, 언제라도 읽던 책을 덮어버리고 그 책 밖으로 걸어나가 수 있는 자유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P192.
    결국 언어란 침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책을 잡는 것은 책을 놓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얼음과 물의 경계

    P195.
    시간이란 모든 대상을 빛바래게 하는 대신 적절한 거리를 베풀어줌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발견을 가능케 한다.

     

    꾸벅거리며 밤길을 가는자

    P197.
    이미지는 그것이 잉태된 최초의 순간으로부터 멀어져가면서 마음의 눈이 새롭게 만들어낸 산물이다. 이미지는 없는 것을, 사라진 것을 불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망각 속에 길들여져 가는 우리 자신을 다시금 비추어주는 빛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그저 부러진 나뭇가지들을 주워모아 불을 지피듯이 그 이미지들을 새롭게 지켜보는 수밖에.

     

    문밖의 어머니

    P202.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속에는 남성적 문학 전통에 길들여진 자아와 조금씩 눈을 떠가는 여성적 자아가 서로 길항하고 있다. 나는 그 두가지 목소리 모두에 귀기울이려고 한다. 
    P205.
    강요된 희생은 여성성을 피폐하고 황량하게 만들지만, 자발적 헌신은 오히려 자기 생명력을 지니고 모든 생명을 키워낸다는 생각은 내 시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 시인의 산문은 읽을 때마다 시를 읽는 기분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Omniscient P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