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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7-2. 다락방의 미친 여자
    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6. 12. 10:00

    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

    * 북하우스 / 박오복 옮김

    (★) >> 개인 생각입니다.

    4부 샬럿 브론테의 유령같은 자아

    9장. 비밀스러운 마음의 상처 "교수"의 학생

    p562.
    표면적으로 보면 샬럿 브론테는 '바이런을 덮고, 괴테를 펼치라'는 칼라일의 충고를 따라 자신의 수정 충동을 철저하게 수정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샬럿의 소설 네 권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자신의 괴테와 자신의 바이런을 어느 정도 동시에 읽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제인 에어>는 고딕풍 악몽의 고백적 형식과 버니언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도덕적 교훈주의를 둘 다 패러디한다. 패러디를 통해 이 작품은 좀 더 냉정한 여자 주인공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고딕적인' 미친 여자의 '섬뜩하게 생생한' 탈출의 꿈을 보여주며 구속과 탈출이라는 여성 특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p565.
    우선 남성적 사회에서 여성의 연약함을 여성이 의식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는 여성 작가는 남성으로 분장함으로써 그런 평가를 더 쉽게 내릴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 작가는 남자로 가장함으로써 중요하고 권력을 가진 타자가 여성 작가를 보는 것처럼 자신을 볼 수 있다. 또한 남자로 분함으로써 여성 작가는 자신의 금지된 환상을 벌할 수 있게 되며 환상을 실행할 수 있는 남성의 권력을 얻는다.

    (★) 크게 반복적으로 관통하는 이야기를 작품의 해석을 통해서 보는 것이 좋다. 

    p595.
    <교수>를 단지 역할과 억압면에서만 논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첫 장편소설로 이뤄낸 젊은 소설가의 성취를 하찮게 만드는 것이다. 이 소설이 작가가 희망했던 대로 현명하며 '분명하고 평범한' 교양 소설이 아니고, 숨겨진 의도의 복잡성에 플롯이 늘 부합하지도 않긴 하지만, 이 작품은 샬럿 브론테의 작가 전체 이력에 걸쳐 점점 중요해질 주제를 처음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은유적으로 눈을 감은 채 글을 쓴 브론테는 여기에서 자신의 소명과 상처를 탐색했고, 완전성을 향한 다른 길을 발견하려고 마치 꿈속에서처럼 더듬거리며 노력했다.

     

    10장. 자아와 영혼의 대화

    평범한 제인의 여정

    p601.
    다시 말해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이 경악한 것은 제인의 분노였다. 또한 이 책에 대한 당대 비평가들이 반응은 최근의 비평가보다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억압된 분노를 신화화하는 것과 억압된 섹슈얼리티를 신화화하는 것은 유사할지라도, 억압된 분노를 신화화하는 것이 사회질서에 훨씬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검은 눈썹이 바이런풍 남자 주인공을 사랑하는 특별한 여성은 소설이나 응접실 안에 수용될 수 있는 존재. 반면 응접실과 가부장적인 저택에서 완전히 도망치기를 열망하는 여자는 수용될 수 없는 존재다
    p685.
    제인은 '두렵지만 사랑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로체스터의 새로운 지배에 분개하고, 결혼 생활이라는 전투장에서 싸울 수 있도록 그와 동등한 몸집과 힘을 원한다. '몸집이 크고 키가 남편과 거의 같은' 버사는 제인에게 필요한 '남자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즉 버사는 제인의 가장 진실되고 가장 어두운 분신이고, 게이츠헤드의 삶 이후 제인이 억제하려고 애써왔던 숨겨진 사나운 자아, 고아 아이의 분노한 자아다. 클레어 로젠펠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심리적 분신들을 이용하는 작가'는 자주 '두 인물, 즉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거나 인습적인 인물과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으며 종종 범죄를 저지르는 자아를 구체화시킨 인물'을 병치시킨다.
    p653.
    제인의 길이 제한되고 고립되어 있긴 해도, 그것은 적어도 희망을 상징한다. 샬럿 브론테는 이후 다시는 이런 낙관주의에 젖지 못했다.

    (★) OMG. 제인에어가 낙관주의가 반영된 작품이라니!!

     

    11장. 굶주림의 기원, <셜리>를 따라

    p656.
    <제인에어>는 앵그리아 이야기와 같은 강렬함이 있어서 초기 독자 중 가장 적대적인 사람들조차 그 이야기를 혁명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신화적'이라고 인정했지만, <셜리> (1849)에서 샬럿 브론테는 <교수>에서 보여준 것보다 더 진한 위장과 더 복잡한 회피로 후퇴하는 듯 하다. 첫 소설 <교수>에서 브론테가 문자 그대로 남자(엄격하고 검열관스러운 남자)로 분장함으로써 리얼리즘을 지향했다면, <셜리>에서는 마치 <제인에어>에서 방출된 분노의 불길에 반하하기라도 하듯, 언뜻 보아서는 사소설을 써나가며 객관성, 균형, 절제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사소설에서 브론테는 이야기가 전개됨에 다라 그녀의 중심 인물들이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오히려 잠재성을 잃어가며 무럴설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역사적인 환경 속에서 외롭게 분투하는 듯하다.
    p656.
    <셜리>가 유기적인 전개에 실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브론테가 평온한 객관성을 창조하고자 새커리처럼 '티탄'의 권위 있는 전지전능함을 추구함으로써, 그녀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가두어버렸던 거소가 본질적으로 똑같은 남성 지배적 구조망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p659.
    그 이유는 남자들을 유지해주는 음식과 허구가 정확하게 바로 여자를 병들게 하는 음식과 허구이기 때문이다.

    (★) 아직 <셜리>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으나, 초반의 설명을 읽다보면 소설이 아닌 역사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p664. (<셜리> 7장 중)
    네가 발견한 대로 그 문제를 받아들여라. 질문하지 마라. 항의도 하지 마라. 그것이 최고의 지혜다.
    p667.
    따라서 그와 다른 공장주들을 통해서 브론테는 자립이라는 노동윤리가 이기심과 성차별주의를 의미할 뿐임을 암시하고 있다. 더 나아가 브론테는 노동자의 착취를 여성의 실업과 연결하면서, 여성과 노동자를 소유물로 취급하는 탐욕적인 정신은 나라의 천연자원에 대한 경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시사한다.
    p677.
    브론테는 성경이 정당화하는 듯 보이는 여자에 대한 착취가 어떻게 상업 자본주의를 영속화시키고, 상업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성과 육체의 본성에 대한 강제적인 통제를 영속화 시키고 있는지 폭로한다.
    p679.
    셜리는 매우 의식적으로 괴물 같고 비정상적이고 배제되어 있고 무력하며 분노에 차 있는 자신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불평등과 착취를 수반하며 눈감아주기까지 하는 문화의 강제적인 신화를 꿰뚫어 본다. (중략) 셜리는 가능한 성 역할에 의해 제한된 자신의 젠더 경험 덕분에 가난한 사람들의 불행을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p685.
    반면 캐서린 언쇼 린턴처럼 캐럴라인 헬스턴도 일종의 저항 수단으로 단식 투쟁을 이용한다. 캐서린은 여자로서 '감금' 당하는/'분만'하는 것을 거부했다. 캐서린의 음식 거부는 부분적을 임신 거부였다. 처녀에게 훨씬 더 자주 발생하는 신경성 거식증은 성숙한 여자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 있다. (중략) 마지막으로 캐럴라인의 굶주림은 사회가 지양분으로 정의한 것의 거부다. (중략) 먹는 것은 자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치욕적인 세계에서는 먹는 행위가 복종을 암시하는 타협이라 할 수 있다.
    p696.
    브론테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는 행복한 결말이 그렇게 쉽게 현실화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냉혹한 사실의 세계에서 그저 로맨스에 불과한 것은 역사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12장 루시 스노의 파묻힌 삶

    p699.
    평등한 삶을 요구했던 프랜시스 앙리와 제인에어를 비롯해 저항하는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던 캐럴라인 헬스턴에 이르기까지, 용기와 활력이 점차 쇠퇴해가는 과정은 루시에 이르러 비로소 복종과 침묵으로 완성된다. 이것은 마치 샬럿 브론테가 여성들에게 질식할 것같은 절망감만 안겨주는 늙어가는 과정을 성숙의 과정과 동일시하는 것 같다. 사실 소설들이 진전됨에 따라 여성들은 파괴적인 가부장 사회의 구속을 내면화하고 이로써 점차 도피가 어려워진다. 여성들은 자신 안에 갇힌 채 출발 시점부터 패배하는 것이다.
    p703.
    동시에 <빌레트>는 작가의 탈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블론테의 등장인물들이 가부장적 사회제도에 감금 당하는 것처럼 여성 예술가로서 브론테도 남성적 관습에 의해 구속받아왔기 때문이다. 브론테는 여성의 언어를 탐색하면서 남성 문화의 부적절함을 고찰한다. 남성이 고안해낸 예술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녀는 여성의 상상력이 여성 자신에게 미치는 위험을 탁월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p732.
    따라서 이 장은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남자의 반응이 아무리 다양할 지라도, 그 반응이 한결같이 여자들을 통제하려는 남자의 자만으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최대한 인식할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다.
    p753.
    가부장제를 거부하는 여자는 타자의 통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해방을 통해서 권력을 찾고자 한다. 여자들에게 권력 자체는 치명적이지 않아도 위험한 것처럼 보인다. 사회에 수용될 수 있는 통로를 제공받지 못한 독립적이고 창조적인 여자는 교활한 마녀로 낙인 찍힌다. 만약 그녀가 예술가가 된다면, 그녀는 자아 파괴의 가능성에 직면하고, 만일 그녀가 예술가가 되지 않는다면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파괴할 것이다.

    (★) 브론테가 어떤 의미의 현상학자라라는 말이 와 닿는다. 소설은 허구이고 상상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자전적 소설이 있기도 하고, 그 허구를 빌어 당대의 상황이나 모순을 노출시키는 예술적 도구이기도 하니까.

     

    5부. 조지 엘리엇의 소설에 나타난 감금과 의식

    13장. 상실감이 빚은 예민함

    조지 엘리엇의 숨겨진 비전

    (★) 제목의 의미심장함.

    p769.
    엘리엇의 회의주의는 그녀가 몰두한 불가지론과 리얼리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엘리엇의 회의주의는 그녀가 진정한 빅토리아 시대의 현자에게 기대되는 오당함에 찬성해 빅토리아 시대다운 타협을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p775.
    허버트 스펜서에 따르면 엘리엇은 자신이 래티머에게 부여한 똑같은 종류의 '이중의식'에 대해 불평했다고 한다. 자기를 비판하는 경향은 그녀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 습관적으로 나타났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자기 비하와 자아 불신으로 이어졌다.
    p776.
    엘리엇은 사실상 '반은 여성적이고 반은 유령 같은' 래티머의 무력감, 침묵, 이인자 자리, 약한 몸, 상처 받은 영혼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예술과 젠더에 대한 태도를 의미심장하게 드러낸다. 사랑받고 싶은 강렬한 욕구에 따라 움직이며 강압적인 아버지의 세계에서 어머니 없이 살아가는 여성은 살아남기 위해 수동성과 병약함에 의존해야 하는 전형적인 둘째 아이다.
    p777.
    가정에서 여자는 가족이 말하지 않은 욕구와 느낌을 감지하도록 교육받기 때문이다. 자기희생적인 체념 이면에는 자신의 이해와 대립하는 요구를 하는 낯설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늘 따라다닌다는 정신분열적 인식이 존재한다. 

    (★) 미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한 예민함이라니

    p803.
    따라서 엘리엇에게 의식의 타락 상태와 여성의 내밀한 상처는 자기 혐오로 인한 무력감과 관련된 주제일 뿐 아니라 속박이기도 하다. 이런 자기 혐오는 여성이 자신의 탁월성 때문에 (말하지는 않을지라도) 불가피하게 얻는 인식과 모순되는 가부장적인 가치를 수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중략) 엘리엇은 '여성이 지닌 가장 유해한 형태의 어리석음'을 강력하게 공격한다. 엘리엇이 여자 주인공들에게 내리는 징벌, 빈번한 병의 발작, 빈번하게 드러나는 비판적이면서도 자상한 어조, 그녀의 남자 같은 필명,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성과 동일시되지 않으려는 엘리엇의 강한 바람을 암시한다.

    (★) 책에서는 아들뻘의 젊은 남자(21세 연하)와 서두른 결혼 (7개월), 조지 루이스와의 동거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가족과 절연까지 하는 당시대에 기행에 가까운 모습이 추가로 설명됨. 그리고 그녀의 본명은 Mary Ann Evans. 

     

    14장. 파괴의 천사 조지 엘리엇

    P826.
    엘리엇처럼 풀러도 자신이 주제 넘은 야망을 성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열망과 동일시했다. ‘나는 줄곧 생각했다. 나는 쓸 수 없을 것이라고. 모든 것을 커튼 뒤에 숨겨둘 것이라고. 여자처럼 사랑과 희망과 실망에 대하여 쓰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남자처럼 지성과 행동의 세계에 대해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P830. 
    엘리엇은 이 두 사람의 미국 여성을 전형으로 삼았음이 틀림없다. 마거릿 풀러는 ‘작가 되기에 대한 불안’이라고 불렀던 문제에 대해서는 쓸 수 없었지만 전통적인 문학 장르 안에 속하지 않는 야심찬 인생을 살면서 그 문제를 해결했던 반면, 해리엇 비처 스토는 자신이 창조한 허구 세계에서 자신에 대한 묘사를 배제하며 똑 같은 문제를 해결했다. (중략) 따라서 풀러나 스토는 둘 다 자아상을 그릴 때 머리를 떠나지 않던 뮤즈 어머니라는 이상에 방해받았음은 분명하다. 두 사람은 남성의 정신을 여성의 마음과 결합하여 노력하는 개인의 고통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그렇게 범주화됨으로써 벌어지는 사회 안의 갈등도 염려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가슴이 머리에 동의하는것인지, 아니면 단지 가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힘을 막아버리는 수동성, 다정한 속성을 가혹한 성질로 변질시키는 혐오감, 인생의 아름다운 기억을 파괴하는 의심을 발휘해 머리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인지’ 의심한다.
    P855.
    샬럿 브론테가 저항했던 모든 부정적 전형이 조지 엘리엇에 의해 미덕으로 전환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브론테는 여자가 지적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저주하는 반면, 엘리엇은 지적인 결핍이 초래할 무서운 결과는 인정하지만 이 결핍 덕분에 여자에게는 감정적인 삶이 더 풍부해진다고 암시한다.

    (★) 이런 관점에서 엘리엇 작품의 인자한 여성의 캐릭터가 설명이 되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결혼한 여성의 우울한 삶의 묘사는 어느 작가와 다를 바 없는 듯.

    P895. 
    엘리엇은 지식을 추구하고 ‘남자의 머리와 여자의 가슴’을 결합시키는 전통적으로 남성적인 임무를 여자의 방식으로 수행하면서, 젠더에 기초한 범주들을 부적절하게 만든다. 

    (★) 직물에 비유하는 것은 여러 이야기들, 주인공, 내재적 의미가 얼기설기 엮여 있어 촘촘한 구조와 내용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것 같다.

     

    6부. 고통의 힘, 19세기 여성의 시

    15장. 체념의 미학

    P921.
    이 문단을 대강만 읽어봐도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들은 사소하고 교훈적인 것을 다룬다고 비난받고 심오한 주제를 어리석게 피상적이고 멜로드라마적으로 ‘떠들어댄다’고 책망당한다. (중략) 레트키의 언어는 남자들의 예술을 전복하는 것은 정확하게 문학적 여성들의 성임을 암시한다. ‘신에 대항해’ 프로메테우스 같은 주먹을 휘두르는 것은 완벽히 이성적인 미학 전략이지만, ‘아주 작은’ 여성의 발자국을 찍는 것은 매우 다른 이야기다.
    P926. 
    다시 말해 여성 소설가는 미친 여자의 분신이나 다른 악마적인 분신에 대해 쓰면서 작가가 되는 일에 대한 불안을 피하거나 쫓아내는 반면, 여성 시인은 문자 그대로 미친 여자가 되거나 악마적인 역할을 맡아야 하고, 전통과 장르, 사회와 예술의 교차로에서 한없이 극적으로 죽어야 하는 것이다. 

    (★) 소설을 쓰면서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그 시대 작가들.

    P928.
    울프가 보여주었듯 소설 쓰기는 단지 ‘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학적이기보다 상업적이고, 성스럽기보다 실용적이기 때문에 여성의 직업으로 더 적절하다고 여겨졌다. 20세기까지 물질적 사회적 ‘리얼리티’를 추종하는 장르였던 소설은 귀족주의적 교육 대신에 있는 그대로 기록할 것을 빈번하게 요구한다.
    P929. 
    분명 여기에는 삼중의 속박이 있다. 첫 번째로, 호메로스에 대해 적당히 존경을 표할 주 아는 여성 시인은 (18세기 ‘문학병에 걸린 여자’가 야유 받았듯) 무시당하거나 심지어 조롱당한다. 두 번째로, (그런 공부가 허용되지 않아서) 호메로스를 공부하지 못한 여성 시인은 경멸받았다. 세 번째로, 여성 시인이 ‘옛 법칙’을 대체하려고 어떤 다른 전통을 시도할 경우 그 전통은 교묘하게 모욕당했다.
    P954. 
    여성 작가의 이름 문제가 여전히 지속된다는 사실은 여자들이 시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문제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머니들로부터 물려받은 위험한 시를 보존하지 못한다는 문제도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P973.
    <도깨비 시장>은 단지 다른 여자들의 삶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로세티가 자신을 위해 고안한 미학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키츠가 무덤을 넘어서까지 자신을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로세티는 왜 괴로움을 마시며 ‘체념’이란 관에 자신을 생매장해야 했는지 설명해준다.

    (★) 시도 소설과 같은 서사가 있다.

    P982.
    오로라 리의 가슴속 ‘열기와 과격성’이 아무리 길들여진다 해도 그 서광 같은 불길은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배럿 브라우닝이 사방으로 ‘여성 선배들’을 찾아 다녔고, 그녀 자신이 영국과 미국을 통틀어 모든 현대 여성 시인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분명 브라우닝은 에밀리 디킨슨의 정신적 어머니였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에밀리 디킨슨은 브라우닝의 타협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녀는 브라우닝의 ‘통찰적 시선’에 매번 영감을 받았고, 바로 그 시선을 통해 시를 쓸 때 여성 시인을 괴롭히는 ‘문제’를 해결했다.

     

    16장. 흰 옷을 입은 여자

    에밀리 디킨슨의 진주 실

    (★) 에밀리 디킨슨이 장시, 산문, 소설, 로맨스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됨. 매우 놀라움.

    P985.
    로세티와 배럿 브라우닝은 자신들의 재능을 위장하지만 감추지는 않는 위장 보호막을 채택했다 점에서 그들의 억압적인 사회 안에서 성공을 거둔 여성으로 칭송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논평은 에밀리 디킨슨이 전통적으로 가장 사탄적이며 단호하고 과감하며 여성에게는 가장 위험한 문학 장르인 서정시를 통해 성취했던 시적 자아 창조의 위대함을 시사하고자 한다.

    (★) 디킨슨의 미친 여자로서의 삶은 슬프다. 미친 여자로 분해서 정말로 방에 갇힌 광장공포증을 가진 미친 여자가 되버버렸다는 것.

    P986.
    사실상 정교한 극적 독백으로 이해되는 디킨슨의 시는 확장된 소설 속 ‘대화’이며, 소설의 주제는 가상 인물의 삶이다. 그 인물은 원래 에밀리 디킨슨이지만 스스로 에밀리 데이지, 에밀리 형제, 에밀리 아저씨, 디킨슨 삼촌 등으로 다양하게 이름 지었다.
    P999.
    반면에 아이 가면 (또는 태도나 복장)은 결혼의 공포에서 디킨슨을 자유롭게 해주고 품위 있는 장난감과 ‘놀 수 있게’ 해주었지만, 결국 디킨슨이 절뚝이는 자아가 되도록 위협했다. 즉, 그 자아는 디킨슨의 고딕적 삶의 허구가 위기에 부딪혔을 때, 어린 여자아이가 육아실에 갇히듯 아버지의 집에 디킨슨을 감금시켜버렸다. 복장이라는 의미에서 습관이었던 것이 중독이라는 더 치명적 의미의 습관이 되었고, 결국에는 이 두 가지 습관 때문에 디킨슨은 내면의 거주자 (뇌리를 떠나지 않는 내면의 타자)는 물론 외부의 거주지(피할 길 없는 감독)를 얻었다.
    P1038.
    그러므로 디킨슨의 흰색은 불꽃과 눈, 승리와 순교 모두와 연관되어 있는 빛의 양 칼날이다.

    (★) 거미 하나로 이렇게 다양한 관점의 해석이 전개될 수 있을까.

    P1081.
    그 필사본의 필체는 매끄럽게 흐르며 깔끔하고,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보여주는 난외의 주석은 매우 전문적이다. (틈, 분열, 망설임, 휴지를 나타낼 의도였다고 우리가 생각한) 그 유명한 대시들조차 타이핑 원고보다 필사본에 더 깔끔하고 더 공들인 모습으로 쓰여 있다.
    P1090.
    우리가 보아왔듯 디킨슨이 이런 시에서 보통 묘사하는 신은 사나운 남성이었다. 황궁의 주인이거나 가부장적인 ‘정체 모를 아버지’였으며, 그의 지배는 디킨슨의 삶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디킨슨은 그녀의 시적 생애에 적어도 두 번, 자신의 통상적인 위장을 벗어던지고 자신이 살기를 갈망하는 신비한 초원을 지배한 자연의 여신에 대해 솔직하게 썼다. 언젠가 디킨슨은 화산이 아니라 ‘다정한 산’에 대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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