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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6. 열세살 여공의 삶
    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6. 11. 14:55

    신순애

    p89.
    내 미싱사가 7번이었으므로 나는 당연히 7번 시다가 되었다. 평화시장에서는 사람을 번호로 불렀다. 그것은 옷이 잘못되거나 불량이 나올 때 그것을 수선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p108.
    나뿐 아니라 당시에 여성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하면 가난한 가정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고 성실하게 순종적으로 일했다. 그런데 당시에 박정희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자주 '근면'을 강조했다. (중략) 더욱이 20-30년을 미싱을 하다가 이제 노환으로 시력이 나빠져 건물 청소를 하러 다니고 있으며 일밖에 모르는 50-60대 여성들이 아직 내 집 하나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게 현실인데, 이들이 과연 근면하지 않아서 이렇게 어렵게 살고 있는 것일까?
    p130.
    그렇게 과로에 시달린 탓에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실제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꽃다운 10대의 윤기 있는 피부는 찾아볼 수 없었다. "평화 시장에서 3년만 일을 하면 고물이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p133.
    어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계셨다. 막내딸이 영양실조라는 말에, 어머니는 당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그 돈으로 돼지고기를 마련하셨다. (중략) 그 이후 어머니의 쪽 지은 머리는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어머니는 머리를 대충 뒤로 올려 묶고 다니셨다. 그 이후에도 여러번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잘려 나갔다.
    p153.
    공장에서는 칭차보다는 야단맞는 일이 더 많은데, 노동교실에서는 가는 곳마다 웃음과 사랑과 행복이 가득했다. 어쩌다 내가 무표정하게 있으면 "순애 씨, 어디 아파?"하고 물었다. 공장에서 일을 할 때에는 옆 사람이 아파도 배려 삼아 쳐다볼 수조차 없다. 미싱할 때에는 미싱 바늘만 보고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p181.
    * 1966년 첫 월급은 700원을 받았다. 하루 버스 요금 20원, 한 달 출근하는 날 28일, 그러면 560원이 한 달 교통비로 지출되었다. 월급에서 교통비를 빼고 남은 것은 겨우 140원이었다. 한 달에 두 번 쉬는 날도 못 쉬게 되면 버스비는 600원, 결국 남는 것은 100원이었다.
    p316.
    우리는 길거리의 잡초처럼, 누군가에게 밟혀 상처가 나도 그 아픔을 딛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살아가고 있다. 가정에서 존경받는 어머니로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밝히기 위해 헌신할 줄 알는 중년 여성들로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 

     

    (★)
    이 책은 연구 논문(정성적 연구)이었다. 나는 사실 자전적 에세이로만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개인을 넘어 과거의 여공들의 생활과 어려움 등이 기술되어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을 빨갱이로 몰아 가거나 성적 폭력을 가하고, 경제/사회 활동을 제약하는 블랙리스트의 불이익까지 제공했던 그 시대가 있었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진 않는다.

타인의 시선으로... Omniscient P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