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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1. 아몬드
    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5. 31. 10:21

    손평원

    p19.
    '네가 조금만 진지하게 말했더라면 늦지 않았을 거다.'
    옆에서 경찰이 유치원생이 뭘 알겠느냐며 고꾸라지려는 아저씨를 간신히 받아 세웠다. 나는 아저씨의 말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나는 줄곧 진지했다. 단 한 번을 웃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그런 질책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섯 살의 짧은 어휘로는 그런 의문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냥 잠자코 있었다. 나를 대신해 엄마가 목청을 높였다. 경찰서 안은 삽시간에 아이를 잃은 자와 아이를 찾은 자의 소란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p29.
    누구나 머릿속에 아몬드를 두 개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귀 뒤쪽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깊숙한 어디께, 단단하게 박혀 있다. 크기도, 생긴 것도 딱 아몬드 같다. 복숭아씨를 닮았다고 해서 '아미그달라'라든지 '편도체'라고 부르기도 하다.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아몬드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자극의 성질에 따라 당신은 공포를 자각하거나 기분 나쁨을 느끼고, 좋고 싫은 감정을 느끼는 거다.
    그런데 내 머릿속의 아몬드는 어딘가가 고장 난 모양이다. 자극이 주어져도 빨간 불이 잘 안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왜 웃는지 우는지 잘 모른다. 내겐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희미하다. 감정이라는 단어도, 공감이라는 말도 내게는 그저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
    p35.
    - 튀지 말아야 돼. 그것만 해도 본전이야.
    그 말은 들키지 말라는 뜻이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걸. 그걸 들키면 튀는 거고 튀는 순간 표적이 된다. 단순히 차가 다가오면 몸을 피하라는 수준의 지침으로는 부족했다. 스스로를 감추려면 고도의 연기가 필요한 타이밍이 온 거다. 엄마는 지치지도 않고 상상력을 발휘해 극작가 수준으로 대화 내용을 덧붙여 갔다. 이제는 상대가 던지는 말 '속에 담긴 '참 의미'와, 내가 하는 말에 담겨야 할 '바람직한 의도'까지도 함께 짝지어 외워야 했다.
    p48.
    이미 인터넷 중고 거래가 성행하는 상황에서 헌책방이 잘되는 장사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끝까지 헌책방을 고집했다. 헌책방은 현실적인 엄마가 내린 가장 비현실적인 결저잉었다. 그건 엄마가 오랫동안 품고 있던 꿈이기도 했다. 한떄는 할멈의 소망대로 엄마에게도 작가각 꿈인 시절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인생이 할퀴고 간 자국들을 엄마는 차마 글로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자신의 삶을 팔아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고, 그건 작가의 깜냥이 아닌 거라고 했다. 그 대신 엄마는 다른 사람들의 책을 팔기로 했다. 이미 시간의 냄새가 밴 책들. 때 되면 들어오는 신간들 말고, 이왕이면 엄마가 하나하나 고를 수 있는 것들로. 그게 헌 책이었다.
    p49.
    책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순식간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p50.
    책은 달랐다. 책에는 빈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단어 사이도 비어 있고 줄과 줄 사이도 비어 있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앉거나 걷거나 내 생각을 적을 수도 있다. 의미를 몰라도 상관없다.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일단 반쯤 성공이다.
    p63.
    남자의 초라한 책상 위에는 보란 듯이 크고 거친 필체로 쓴 유서가 놓여 있었다.

    오늘 누구든지 웃고 있는 사람은 나와 함께 갈 것입니다.

    남자의 일기장에는 그가 세상을 중오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즐거울 것 없는 세상에서 미소를 띤 채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살의를 느낀다는 암시도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었다. 
    p88.
    엄마는 늘 집단생활에는 희생양이 필요하다고 얘기했었다. 엄마는 내게 그 지난한 교육을 시킨 것도, 내가 그 희생양이 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할멈이 사라진 지금 엄마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아이들은 내가 어떤 얘기에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걸 금세 눈치챘고, 그러나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나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짖궂은 농담을 퍼부었다. 더 이상 경우의 수를 늘려 가며 예상되는 대화를 만들어 줄 엄마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p90.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걸 바라단다. 그러다 안 되면 평범함을 바라지. 그게 기본적인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이다, 평범하다는 건 사실 가장 이루기 어려운 가치란다.
    p110.
    곤이가 내게서 어떤 반응을 원하는지는 뻔했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그런 아이들이 있었다. 괴롭힘당하는 아이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 상대방이 울면서 제발 그만두라고 빌기를 바라는 아이들. 그 애들은 대부분 힘을 써서 자기들이 원하는 걸 얻는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곤이가 원하는 게 내게서 어떤 자그마한 표정의 변화라도 보는 것이라면 그 애는 영원히 나를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럴수록 힘이 부치는 사람은 곤이 자신이라는 것도.
    p132.
    엄마는 늘 나의 상태를 비밀로 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나와 자신의 인생을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엄마는 내가 모르는 엄마였다. 엄마에게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p172.
    귓가를 떠돌던 엄마의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곧 엄마의 목소리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알던 모든 게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p259.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

     

    작가의 말

    p261.
    매일매일 아이들이 태어난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축복받아 마땅한 아이들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군가는 사회의 낙오자가 되고 누군가는 군림하고 명령하면서도 속이 비틀린 사람이 된다. 드물지만 주어진 조건을 딛고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좀 식상한 결론일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도, 괴물로 만드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청소년 문학이라고 해도 어른들 못지 않은 잔인함이 늘 있는 것 같아 이게 맞나? 싶다가도 나이에 따라 인생이 다른 거 아니니 그럴지도 하는 마음이 있기도 하다.

타인의 시선으로... Omniscient P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