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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4. 17. 08:38

    김미월

    가장 아름다운 마을까지 세시간

    p11.
    회사를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와서 다시 취직을 하고 몇년 근속하다가 또 홀연히 사직서를 내고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양희의 특기이자 취미였다. 이십대부터 그러더니 서른 아홉인 지금까지 그랬다. 하지만 사직도 취직도 개똥처럼 쉽게 생각하고 일단 저질러보는 그녀의 철없음이랄까, 대책 없음이랄까, 그 터무니없이 측흥적인 성격은 그녀가 매번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한다는 점에서 실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나무라다니. 진짜 개똥도 개똥처럼 쉽게 생각하지 못해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오만가지 의미를 부여하다가 번번이 때를 놓치고 마는, 인생의 반은 한 일에 대한 후회요 나머지 반은 하지 않은 일에 대하 회한으로 보내는 나로서는 그녀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p55.
    그러니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내일 죽는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죽기 전까지 매 순간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이 부질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 살아 있는데도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게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p97.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졌다가 새카매졌다가 알 수 없는 색으로 덧칠되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인칭으로 쓸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오래전 마주 앉은 여자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 날처럼 그는 이번에도 삼인칭을 택해야 할 것이었다.

     

    2월 29일

    p127.
    맥이 풀렸다. 그럼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다 무엇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나는 가본 적도 없는 곳을 그리워하고, 존재한 적도 없는 추억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 적도 없는 사람과 헤어진  것인가.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물이 빠진 갯벌에서 조개가 모습을 드러내듯 이윽고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그와 헤어진 후 나는 한번도 슬펐던 적이 없다. 그와 한번도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그를 한순간도 사랑한 적이 없다.
    이 세상에 사랑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오늘의 운제

    p143.
    이대로 이렇게 죽는다면 억울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렇게 죽는들 별로 억울할 것도 없었다. 행복하게 누릴 것 다 누리며 산 사람은 죽을 때도 여한이 없을 것 같고, 반대로 실컷 고생만 하며 불행하게 산 사람은 죽을 때도 억울할 것이라 막연히 믿어왔는데, 막상 죽음이 코 앞에 닥치니 어떤 면에서는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불행한 사람이 불행한 삶에 무슨 미련이 있어 더 살고자 하겠는가. 어제 불행했으면 오늘도 불행한게 당연하고 내일도 불행하기 마련이었다. 정말로 불행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더더욱 정말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질문들

    p163.
    내가 사회에 나와 깨달은 것들 중 하나는  이 세상에는 정말로 많은 질문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고 또 질문 받아야 한다.

     

    선생님, 저예요

    p204.
    대체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이제 와 사죄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 때는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해야 할까요. 몰랐다는 게 변명이 되기는 할까요. 아무 생각없이 지적인 거짓말 한 줄이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정말 몰랐다고, 그렇게요? 아아, 정말 모르겠습니다.

     

    도망가지 않아요

    p227.
    완구는 울컥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정말로 원했던 신부는 조갯국 잘 끓이는 여자도 아니고 사장 말마따나 잘 웃는 여자도 아니며 그저 자신을 좋아해주는 여자라는 것을.

     

    연말 특집

    p263.
    하나마나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가정을 하면서 깨달았다. 선은 옛날 일을 용케 기억해낸 것이 아니었다. 실은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만보 걷기

    p291.
    여행은 본디 그곳에서 태어나야 했으나 어쩌다보니 태어나지 못한 또다른 고향을 찾아다니는 일이라는, 늘 믿고 싶었던 그 말을 춘천에서 비로소 믿게 되었다고. 그래서 춘천에 눌러 앉게 되었다고 말이다.

     

    (★)
    이 책은 두번째 글의 제목을 보고 선택했다. 연인과 헤어지고 처치곤란한 물건들, 받았던 선물이나 커플로 맞춘 물건들을 버리자니 그렇고 놔두자니 그렇고 하면 차라리 바자회 같은 게 나을지도 모른다. 요즘에는 고가의 선물을 되돌려 달라고 하기도 하고, 중고 플랫폼에서 거래를 하기도 하던데. 추억이라고 해서 모두 다 가져갈 필요는 없는 것이겠지.

타인의 시선으로... Omniscient P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