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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4. 17. 09:10

    박영규

    p22.
    고려가 요동을 공격하기로 한 것은 명이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는 데다 철령 이북 땅을 차지하겠다고 고려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p23. 
    사학자들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두고 엇갈린 주장을 펴고 있다. 위화도 회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계획된 쿠데타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요동성을 공략할 수도 안할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단행한 자구책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이성계의 사불가론 중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한 부분에 대해 사대주의적 사고라고 비판하는 사가들도 있고, 한편으로는 명나라를 달래기 위한 실리주의적 선택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보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정권 장악을 노린 쿠데타였다. 그러나 경쟁 관계에 있던 조민수와 함께 회군을 단행한 것을 볼 때 계획된 행동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고 오히려 상황 판단에 따른 실리적인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p37.
    조선이라는 국호의 결정과 관련하여 조선과 명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조선 측에서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동시에 계승한다는 의도였지만, 명은 기자조선을 의식하고 조선이라는 국호에 쾌히 동의했던 것이다.
    p54.
    양민과 천민의 이분법적 신분구조를 확립한 조선은 법적으로 고려에 비해 양민들의 신분 이동을 자유롭게 했다. 농민이 학생을 배출하고 그 학생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오르면 양반의 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었고, 양반의 자제가 과거에 오르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농민으로 전락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양민 내부에서 신분의 고착화가 이뤄졌다.
    p80.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태종실록> 부터이다. (중략)
    이런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 격퇴를 위한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의 일종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거북선은 왜구 침입이 잦았던 고려말기에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p87.
    태종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던 저화정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 조정은 세종대에 이르러 동전인 조선통보를 발행하여 법화로 정착시키게 된다.
    p102.
    흔히 훈민정음은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으로 이해되거나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고 세종이 후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이해이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거의 홀로 만든 것이다. 아니, 홀로 만들수밖에 없었다. 
    p103.
    세종은 왜 이 일을 홀로 극비리에 진행했을까? 그 답은 훈민정음 공표에 반대했던 최만리의 상소문에 잘 나타나 있다. 최만리의 상소문을 요약하자면 첫째는 새 문자를 만들어 단독으로 쓴다는 말이 중국에 흘러들어가면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화의 문자인 한자를 대신하여 훈민정음을 쓰면 스스로 오랑캐가 된다는 논리, 셋째는 설총의 이두로써 가능한 일을 굳이 훈민정음으로 대체할 필요가 없다는 것, 넷째는 창제 취지 중 하나로 훈민정음 보급이 억울한 사람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가 옳지 않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내용의 골자는 '사대'와 '권위'였다.
    p127.
    세자 향은 1442년부터 1450년까지 8년간의 섭정을 통해 정치 실무를 익혔고, 여러가지 치적들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세종 후반기의 정치 치석은 세자 향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p130.
    따라서 현재 <문종실록>은 11권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어, 문종 시대인 1451년 12월과 1452년 1월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고증은 불가능한 상태다.
    p136.
    조선이 개국 초부터 재상 중심제를 정치 이념으로 삼았던 점을 감안할 때 사실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어도 통치에서는 별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p203.
    갑자사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모친 윤씨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으로 비치지만 사실은 연산군과 임사홍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벌인 고의적인 참살극이었다.
    p205.
    또한 연산군에 대한 동정론을 펴는 사람들은 흔히 조선왕조사에 또 한 명의 폭군으로 기록된 광해군과 비교하려 들지만 이 또한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광해군은 정치 역학의 희생자인 데 반해, 연산군은 인륜과 민심을 배반한 독재자였기 때문이다.
    p236.
    대개 조광조의 왕도정치 실패의 원인은 정치이념의 진보성과 실현 방법의 과격성에서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원인은 당시의 정치 체제가 왕도 정치를 실현할 만큼 성숙되지 못한 것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p254.
    을사사화는 무오, 갑자, 기묘사화와 더불어 조선 4대 사화 중 하나로 1545년 (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추가로 확인한 부분
    1) 무오사화 (1498, 연산군)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으로, 훈구파에 의해 신진 사류가 화를 입음
    2) 갑자사화 (1504, 연산군)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위 문제가 시발점이 된 사화
    3) 기묘사화 (1519, 중종)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의 숙청
    p267.
    명종이 죽고 그를 이을 적손이 없자 중종의 서손인 하성군이 왕위를 이어 받음으로써 조선은 이른바 방계 승통 시대를 열어나갔다. 이로 인해 외척 중심의 척신 정치가 사라지고 사림 세력이 중용되어 붕당정치 시대가 도래했다.
    p271.
    선조는 흔히 임진왜란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왕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명종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외척정치를 없앴으며 신권 중심의 정치를 구현한 뛰어난 왕이었다.

    p282.
    우리는 당쟁으로 인해 조선이 망했다는 그릇된 인식을 강요받아왔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강요된 이 같은 식민 사관의 근본문제는 바로 붕당정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되었다는 데 있다.
    p299.
    그래서 흔희 그의 문학을 비꼬아 귀양문학 또는 좌천문학이라고 하지만, 사실 당시의 관리들은 유배지나 은거지에서 학문적 업적을 쌓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황과 이이는 물론이고 후대의 정약용이나 박세당 등의 실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조선시대의 유배지는 바로 학문과 문학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p309.
    조선의 사관들은 광해군을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명분론자들이 자신들의 반란을 합리화한 측면이 강하다.
    p310.
    폭정이란 원래 집권층에게 행사된 정치적 행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민생을 위협하는 폭력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p311.
    혹자는 인조반정을 중종반정과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연산군이 철저한 폭군이었던 것에 비해 광해군은 일부 사대주의자들과 단지 정치적 이념을 달리한 현실적인 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종은 반정세력의 추대를 받은 경우였지만 인조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반정을 주도했다. 중종반정이라고 일컫는 사건이 연산군 폐출사건이었다면 인조반정은 그야말로 반정이자 역모였다고 말할 수 있다.
    p351.
    병자호란을 통해 이러한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노선을 제대로 살렸더라면 변란은 물론이고 그동안 중국과 맺어오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국력을 신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p369.
    예송은 현종, 숙종 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복상 기간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간의 논쟁을 말한다. 이 논쟁은 표면적으로 단순한 왕실의 전례 문제인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예를 최고의 덕으로 여기던 성리학의 핵심 문제이다. 또한 왕위 계승 원칙인 종법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간의 정권 주도권을 둘러싼 이념 논쟁이었다.
    p388.
    경신환국(1680년)
    경신환국은 1680년(숙종 6년) 경신년에 남인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축출된 사건을 일컫는다.
    p390.
    기사환국(1689년)
    기사환국은 후궁소의 장씨의 소생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p392.
    갑술환국은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이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 문제와 관련하여 대거 축출당하고 다시 서인이 집권한 사건이다.
    p441.
    정조시대는 이처럼 양반,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부흥기였다. 그러나 문예부흥을 가능하게 해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이었다.
    p500.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미국에 이 조약의 무효를 호소하기 위해 1905년 11월 미국 공사로 있던 헐버트에게 밀서를 보냈다. 하지만 미국은 그 당시 이미 필리핀에서 미국의 우월권을 인정받는 대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는 '가쓰라 태프트 협정'을 체결한 상태였다.

     

    (★★)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는 이 역사를 위한 승자의 기록이든 패자의 기록이든 기록을 남긴 모든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임에도 학교 역사 수업에서 배웠던 것들이 가물가물해진다. 이 책을 다시 읽게 되면서 또 한번 아, 그랬지 했던 나 자신을 발견한다.
    조선의 건국과 관련해서 의견이 좀 갈리는 것 같다. 회군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렇다면 고려는 명과의 싸움을 이기고 나라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까?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역사 역시 선택되지 않은 상황들에 대해서 한번은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조선의 건국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국호개정조차 명에게 허락을 구하는, 어찌보면 독립되지 못한 속국의 성격이 두드러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선 초기의 긍정적인 체계, 즉 신분간 이동이나 다소 자유로움이 유교 사상 속에서 점점 계급화되고 붕당정치가 주가 되고, 서로 헐뜯고 싸우는 조정에다가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 그래도 다소 인정 받는 성군들이 중간중간 등장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겠지.
    추가로 저자는 조선 말기는 붕당이 아닌, 외척/인척 세력의 독재 때문에 위험해졌다고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붕당정치가 일종의 파가 갈라지는 과정이고, 외척/인척 세력의 독재의 시작이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또한 전란에서 보여주는 실망스러운 정치적 모습에 대해서는 결국 제대로 된 당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지금의 많은 국가들이 쉬이 멸망하지 않았지만, 근대화와 현대화 이전에는 국가의 흥망성쇠가 이렇게도 빈번했을까? 지금도 여전히 정치인들이 싸우느라 정신없고, 도움을 손길을 필요로하는 국민들이 존재하고, 국가 간에 다양한 전쟁도 하고 있는 마당에... 누가 이런 걸 주제로 글을 써주면 좋겠거나 있었음에도 내가 무지해서 몰랐거나...

타인의 시선으로... Omniscient P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