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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도 더 전쯤, 스페인 여행을 가보겠다고 배웠던 스페인어를 집에서 혼자 다시 공부하고 있다. 그 때는 4개월 만에 회화도 어느 정도 가능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돌아서면 내가 무슨 문장을 연습한다고 썼는지도 가물거린다. 겨울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 뜬금없이 '봄'을 제목으로 하고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으로 하는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며칠 전 다시 찾아본 la primavera 라는 단어 때문이다.
봄, spring, 그리고 la primavera. 우리 나라 말에서 봄은 여러 중의적 표현이 있다. 말 그대로 계절의 봄, 그리고 전성기를 뜻하는 '인생의 봄날'이나 '청춘'의 의미. 놀랍게도 스페인어 사전에서 la primavera를 찾으면 비슷한 뜻이 나온다. 물론 구글에서는 Botticelli가 더 유명한 것 같지만.
그래서 겨울이 가까워진 이 늦가을에 나는 나의 전성기를 생각해본다. 몇년전, 박사과정 중에 교수님 한 분이 질문을 했었던 것도 기억난다.
"여러분은 인생의 최고점이 언제였나요?"
교실에 있던 사람들마다 다른 대답이 나왔다. 나는 지금처럼 그 때도 나의 인생의 곡점이 언제였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봤다. 30 초반이었던 것도 같고, 아직 오지 않은 것도 같고. 선뜻 대답하지 못할 때 교수님은 정답은 아니겠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가 참 좋은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최고점이란 이야기는 정규분포에 집착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후에는 하강만이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뭐, 요즘같은 시기에는 기복이 가능한 그래프 모양이라면, 또다른 최고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찌거나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 있다고 대답해버리면, 그 최고점을 능가하기는 어려울 수 있을테니 말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나의 최고점은 언제였는지. 신기하지만 최악의 순간만이 생각이 났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아직 인생의 봄날이 올 기회가 있다는 의미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 힘든 순간이었다. 지우고 있던 사건들도 다시 하나하나 떠오르며 그 당시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바닥을 치면 올라갈 일만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에도 몇번 그런 경우가 있지만 요근래의 나는 점점 물에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다. 지난 주말에는 깊은 물 속으로 내가 하염없이 가라 앉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숨을 쉬기기 어려워지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적막함과 어두움. 현실의 나는 일을 멈추고 잠시 침대에 누웠을 뿐인데 말이다.
그래서 저 단어의 뜻이 더 눈에 들어왔는지 모른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인생의 봄은 언제였을지 묻고 싶다. 있었다면 진심을 다해 축하해주고, 없었다면 위로와 함께 희망을 가져보자고 말을 해줄 것 같다. 지금은 늪에 몸이 잠겨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나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뽀송뽀송한 잔디밭에 누워 적당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겨 미소를 짓는 상황이 절로 떠올려질 수도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