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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태어날 때부터 내가 걱정이 많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짐작하건대, 책임을 지는 행동을 해야 하면서부터 나는 걱정이 많아졌던 것 같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책임을 질 일이 많이 없었지만, 부모님께 혼나면서 배우는 일들이 생기면서부터 다음에는 잘못하면 안된다는 압박감을 느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러면서 걱정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싶다.
또한 나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다. 나의 걱정은 이 상상력에서부터 출발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성인이 되어서 일을 진행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 좋은 것부터 나쁜 것까지 모두 머리에 떠올린다. 좋은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만 나쁜 경우의 수에는 어떤 식으로 대처하면 좋을지 고민을 한다. 그래서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일이 잘못되어 큰 문제가 발생된 적은 많이 없었다. 오히려 대비책 아닌 대비책, 혹은 마음의 준비로 인해서 일이 끝나고 나면 홀가분한 기분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해소되기 어려운 걱정들, 그리고 그로 인한 마음의 힘듦이 찾아왔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상에는 나혼자 풀기 어려운, 나만 잘한다고 해서 잘되는 일은 줄어들고, 내가 예상하지 못한 혹은 내 의지나 잘잘못과 전혀 상관 없는 일들이 늘어나면서 나를 괴롭힌다. 즐거운 순간은 잊고 괴로운 시간만을 기억하다보니 나의 걱정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늘어나고 있다.
마흔은 불혹(不惑), 쉰은 지천명(知天命), 그리고 예순은 이순(耳順). 나는 기대했다. 내가 걱정이 많은 것은 어리기 때문이라고. 마흔부터는 나는 현명한 어른이 되어서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하지 않았던 것들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늘어나면서 나의 걱정 보따리는 줄지 않았다. 마치 설거지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씻겨야 할 그릇이 줄지 않고 늘어나는 기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기분. 하다 못해 밑 빠진 독이라면 호수에라도 던져서 물을 채우고, 설거지에는 식기 세척기라도 사서 돌리겠건만, “해결” 혹은 “해소”만이 정답인 걱정에는 답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하루의 시작도 걱정으로 시작했다. 이번주 엄마의 치료 진행 여부도 결정부터 제품 파손 배송된 건의 환불 처리까지 크고 작은 걱정을 가졌다. 아마 내일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들은 걱정하지도 않을 것까지 포함해서 걱정을 하는 내가 싫기도 하지만, 만약 걱정 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역시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