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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 결혼 고발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8. 13. 10:30
착한 남자, 안전한 결혼, 나쁜 가부장제
사월날씨
연애와 결혼은 별개라거나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사람으로서, 이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일이 기쁘지는 않다. 결혼하면 사람이 갑자기 바뀌거나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람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람의 어떤 모습을 주로 맞닥뜨리게 되는지는 바뀐다.
생활을 함께하는 건 그 사람의 가장 좋은 모습만 편집해서 보는 연애와는 아주 다르다. 연애가 로맨스고 특별함이고 강렬한 감정이라면 결혼은 알람 소리에 힘겹게 눈을 뜨고, 씻은 후에 욕실의 물기를 닦고, 다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고,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는 잔잔한 일상이다.
연애 때의 모습으로 결혼 생활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기는 하지만 많은 것을 유추하기는 어렵다.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시가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시부는 준비해둔 파일을 꺼냈다. 파일의 수신자는 나였다. 나는 일단 인수인계를 받는 신입의 자세로 진지하게 들었다. 나와 남편이 부부가 되자마자 내게 전달하는 사항이니 중요한 것이겠거니 하고. 거기에는 남편의 보험 증서와 시부모의 생일이 적힌 쪽지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임무였다. 시부가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해주는 동안 나는 얼떨떨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파일은 나의 역할을 명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시가의 행사를 챙기고
남편의 신변잡기 문제를 담당하기배려가 쌓일수록 찜찜함도 쌓여간다. 내가 남편 큰집에서 부엌일 하는 걸 당연히 여기는 마음은 배려가 아닌데, 일할 때 옷이 젖으면 안되니 앞치마를 꼭 챙기라고 일러주는 마음은 배려라고 할 수 있나. 모멸 위에 핀 배려의 꽃. 남편이 자신도 나와 같이 부엌에서 일하겠다고 하니 부모를 창피하게 하는 거라며 눈물짓는 마음은 앞치마를 챙기라고 내게 다정하게 말하는 마음과 얼마나 멀고 얼마나 가까울까.
나는 혼란스럽다. 분명 내게 가해지는 게 억압이 맞는데도 상대의 삶과 인격을 자꾸 헤아리게 된다. 마음껏 미워할 수도 마음껏 좋아할 수도 없어 어정쩡하게 서성인다.나는 남편에게 따로 움직이자고 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내가 십년지기 친구의 결혼식을 포기하고 남편 사촌 결혼식에 가야 한단다. 입장 바꿔 본인이었다면 내 사촌 결혼식에 참석했을 거라고 말이다. 남편의 놀라운 주장에 어안이 벙벙했다. (중략)
아무래도 이상했다. 평소답지 않게 억지를 부리는 남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렴풋이 짐작 가는 것이 떠올라 말했다. "당신, 그게 아니라 나 안 가는 걸로 부모님이 한 소리 하실까 봐 그러는 거죠?" 그러자 남편은 한참을 앉아 생각하더니 결국 수긍하는 것 아닌가.남편은 돌봄노동을 모른다.
쉬이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당시에도 별일 아니라 넘겼고 새삼 떠올려봐도 딱히 감정이 요동치는 것은 아닌데 마음에 얼룰처럼 남아 있는 장면. 그제야 '아, 그게 나한테 중요한 무언가였구나' 거꾸로 깨닫게 되는 순간 말이다.
나는 자주 열 감기를 앓았고 그날도 그랬다. 전과 다른 점이라면 더 이상 엄마 집이 아니라 새로운 나의 집에 누워 있다는 것. 침대 하나 놓으니 겨우 문이 닫히는 작고 캄캄한 방에서 나는 조용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푹 자요." 남편이 다정학 말한 뒤 문을 닫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거실에서 텔레비전 보는 남편의 웃음소리를 멀리 들으며 누워 있던 그때, 나는 쓸쓸했던가.(★)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난 뒤, 결혼 전에 겪지 않았던 일을 겪게 되니 나도 당황스러울 때가 많았다.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을 되돌아보면 나만큼 내 동거인도 당황해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인가 의문이 든다. 여전히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들이 간간히 잊혀질 때마다 발생하지만... 지금은 나도 좀 이해는 해보려는 노력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