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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9. 요즘 애들
    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7. 31. 23:15

    앤 헬렌 피터슨

     

    작가의 말, 우리에겐 기회가 없다

    p5.
    많은 사람이 언제든 빚더미의 폭풍에 집어삼켜질 거란 두려움 속에 산다. 우리는 출산과 육아에서,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에서, 삶의 재정 문제에서, 일종의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자 고투하다가 결국 나가 떨어지고 만다. 그렇게 우리는 불안정에 길들여졌다.
    p9.
    이번 팬데믹이 우리에게 보여준 대단히 중요하고도 명확한 사실은, 망가지고 실패한 게 단지 하나의 세대가 아니라는 거다. 망가진 건 체제 자체다.

     

    머리말

    p17.
    어른 되기, 나아가 '해야 할 일' 목록을 완료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현대 세상에서 사는 일이 그 어떤 시대보다도 쉬운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해서다. 이 틀을 통해 보니 내가 '해야 할 일' 목록에 붙박아 놓은 일들을 기피해 왔던 이유가 뚜렷해졌다. 우리에겐 매일 해야만 하는 일들의 목록이,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가 제일 먼저 할당되어야 하는 영역이 있다. 정신적 에너지는 유한하다. 아닌 척 하려고 애쓰다 보면, 그 때 번아웃이 찾아 온다.
    p20.
    번아웃의 한복판에서는 고단한 과제에 뒤따륵 마련인 성취감이 영영 오지 않는다.
    p21.
    번아웃은 우리 시대의 상태다.

     

    1장. 베이비부머의 번아웃

    p63.
    삶의 바탕에 깔린 계급 지위에 대한 초조함을 처리하고,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줄 직업을 찾으려 고투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베이비붐 세대의 번아웃이었다. 시시 각각 울려대는 스마트폰이나 산더미 같은 학자금 부채는 없었지만 기본적인 불편은, 매일 불안에 대처하며 살아가는 것에 따르는 정신적 대가는 존재했다.

     

    2장. 가난부터 배우는 아이들

     

     

    3장.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p104.
    대학은 우리 부모들의 경제적 불안을 낮춰주지 못했다. 중산층 지위를 보장하지도 않았고, 많은 경우엔 취업 시장엔 현실적으로 대비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겪은 대입 준비는 오래도록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반대의 증거가 아무리 등장해도 상관없었다. 열심히 일하면 성공과 만족이 주어진다는 생각을 철석같이 믿어야 한다는 신조가 우리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
    p121.
    타일러는 설명한다. "어른들을 포함해 모두가 자신을 더 그럴듯하게 포장하려 꽤나 거짓말을 지어낸다는 사실을 깨닫고, 저는 전보다 훨씬 냉소적인 사람이 됐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고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어요. 단지 대학에 들어가려 이력서에 넣을 활동을 찾는 십대가 된 기분이었죠."
    p128.
    너무나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이, 많은 희생과 고생으로 얻은 것이, 행복도 열정도 자유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학은 우리에게 선택지를 주었을 지 모른다. 작은 동네나 나쁜 상황에서 당신을 빼내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밀레니얼에게 대학 학위는 우리와 우리 부모들에게 약속했던 중산층의 안정을 안겨주지 않았다. 멋들어지게 가장해봐도 실체는 같다. 우리가 얻은 건, 더 많은 노동일 뿐이다.

     

    4장. 좋아하는 모든 게 일이 되는 기적

    p166.
    우리는 필패하도록 설계된 전투에서 몇년을 더 싸웠다. 사람들은 이 사실에 수치심을 느낀다. 나 또한 그러하다. 충분히 노력하면 달라질 거라고 확신했기에, 나 역시 너무나 터무니없는 조건들에 만족했다. 하지만 복지 없이 최저 임금을 주는 일자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며 월 400달러씩 상환해야 하는 대출금을 어깨에 지고 살다보면, 아무리 열정이 있다 해도 몇 년쯤 니나 뭔가 심하게 글러먹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많은 밀레니얼이 번아웃을 겪고야 이 지점에 다다랐다. 하지만 "열정은 좆까고 돈이나 주쇼"로 대변되는 밀레니얼의 새 구호는 매일 더 큰 설득력과 힘을 얻고 있다.

     

    5장. 일터는 어쩌다 시궁창이 되었나

    p179.
    그럼에도 임시직이 말 그대로 임시로 일하고 있다거나, 적어도 자진해서 임시적으로 일하러 나섰다는 서사는 고착되었다. 결국 임시적 업무는 철저히 여성의 것으로 역지고 경시 받은 끝에 그 일이 찾취인지 아닌지에 관해 아무도 고민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앞으로도 보겠지만 대침체 이후 계약직과 프리랜서를 둘러싸고도 비슷한 서사가 쌓여나갔다. 우버 운전이 점점 줄어드는 교사 연봉을 채우기 위한 절박한 시도임에도 자발적인 부업으로 표현된 것처럼. 경제적 상황의 현실을, 회사가 그들이 내친 노동자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기는 더 쉬워졌다.

     

    6장. 일터는 왜 아직도 시궁창인가

    p205.
    맛있는 간식과 점심 식사가 무상으로 제공되는 사무실은, 지난 20년간 스타트업 기업 문화의 부조리함이나 밀레니얼들이 요구하는 우스꽝스러운 특전을 강조하는 농담거리가 되어왔다. 그러나 점심 제공은 단순한 혵갹이 아니라 과로를 장려하는 정책으로서, 과로의 다른 수많은 교리와 더불어 월스트리트 문화에서 직수입된 것이었다.
    p213.
    과로의 이데올로기가 어찌나 치명적이고 만연한 지, 우리는 과로의 한복판에서 이 상태까지 오게 된 건 온전히 개인의 실패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모든 걸 갑자기 수월하게 만들어 줄 알맞은 인생 팁을 몰라서 이렇게 된 거라고 자기 자신을 탓한다. 그게 <그릿(Grit)>과 <시작의 기술(unfuck yourself)> 그리고 별표속에 비속어와 좌절감을 숨긴 다른 책들이 거대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이유다. 그들은 해결책이 바로 여기, 우리 손이 닿는 범위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 눈에 문제는 현재 경제 체제도, 체제를 착취하고 거기서 수익을 얻는 회사들도 아니니까. 문제는 우리니까.

     

    7장. 전시와 감시의 장, 온라인

    p246.
    디지털 기술들의 특기는 우리에게 무얼 하지 않고 있는지 상기시키는 것이다. 누가 우리를 빼놓고 놀고 있는지, 누가 우리보다 더 많이 일하고 있는지, 우리가 어떤 뉴스를 읽지 않고 있는지 일깨운다. 디지털 기술들은 우리가 잠시 의식을 내려놓은 채 우리를 지켜주고 재생시키는 필수 활동인 승화와 억제를 실행하게 놔두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를 그 반대로 이끈다. 끊임없이 알림의 세례를 보내고, 잊은 것들을 상기시키고, 상호작용을 요구한다. 우리와 다른 이들의 삶의 모든 디테일을 무시할 수 없도록 전방으로 가져온다. 당연히 우리는 더 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
    p253.
    핸드폰의 유혹은 왜 이렇게 큰 걸까? 물론 도파민을 분비시킨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하지만 내가 핸드폰에서 느끼는 더 큰 매력은 우리가 공유하는 하나의 망상에서 비롯된다. 핸드폰이 있으면 내가 미친놈처럼 멀티태스킹을 해낼 수 있다는 망상. 모두를 위해 무엇이든 되어보일 수 있다는 망상. 진정으로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망상. 실제로 매력을 지닌 건 광택이 나는 검은색 직사각형 물체가 아니다. 당신의 삶이 아름답고 무자비할 정도로 효율적일 수 있다는, 무결할 수 있다는, 통제될 수 있다는 생각이 핸드폰을 그토록 매력적으로 만드는 거다.
    p261.
    SNS는 이렇게 우리에게서 번아웃을 상쇄해줄 순간들을 빼앗아간다. 경험을 기록하는데 집착하는 사이, 우리는 실제 경험에서 멀어진다. 또한 SNS는 우리에게 불필요한 멀티태스킹을 시킨다. 과거엔 여가에 사용되었던 시간을 침식시킨다.
    p273.
    디지털이 이 모든 유연성을 만들었다는 건, 사실 디지털이 더 많은 업무를 가능하게 했다는 의미다. 일과 삶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업무 이메일처럼 슬랙 역시 가볍고 간단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참여자들 내면에선 강제적이 ㄴ것이라 느껴지더라도 겉보기엔 그렇지 않다.
    p278.
    번아웃의 근원이 이메일, 인스타그램, 끊임없이 뜨는 뉴스 알림이 아니라는 걸. 주된 원인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 세운 불가능한 기대들을 이루지 못해, 실패와 좌절을 반복한다는 점이다.

     

    8장. 쉬면 죄스럽고 일하면 비참하고

    p283.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너무 많이 일한다는 거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는 우리가 일하지 않는 시간들마저 자기계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거다. 여가 시간에 몸이든, 정신이든, 사회적 지위든, 최적화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를 괴롭힌다. 여가(leisure)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licere로, '허락을 받는다' 혹은 '자유롭다'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그렇다면 여가는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라고 허락 받는 시간,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운 시간이다. 그러나 모든 시간이 이론적으로 더 많은 일로 전환될 수 있다면, 일하지 않는 시간은 잃어버린 기회로, 혹은 비참한 실패로 느끼게 된다.
    p302.
    영화를 보고, 요가를 하고, 팟캐스트를 듣는 게 일인가? 물론 아니다. 일하는 대신 텔레비전을 더 많이 보라는 압박을 받으면 환영할 사람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소비가 다신이 출세를 위한 티켓을 구매할 유일한 방법이라면, 이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처럼 느껴진다. 여가가 아니라 일종의 무급 노동처럼 느껴진다. '휴식'을 취하는 게, 참으로 피로하고 보람 없으며 실질적 회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이유다.
    p314.
    우리의 가장 좋은 자아는, 가장 호기심 많고 창의적이고 온정적인 자아는, 우리가 아는 지금 삶의 표면 바로 아래,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에겐 그것들을 현실로 데려올 공간과 시간, 휴식이 필요할 따름이다.
    p316.
    번아웃을 해결하려면, 당신의 하루를 채우는 것들이 - 당신의 인생을 채우는 것들이 - 당신이 살고 싶은 인생, 당신이 찾고 싶은 삶의 의미와 결이 다르다는 착각을 지워야 한다. 번아웃 상태가 단순한 일중독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번아웃은 자아로부터의, 욕구로부터의 소외다.

     

    9장. 엄마처럼 살기 싫은 엄마들

    p335.
    좋은 육아가 어떤 모습인지 가난한 부모들이 모르는 게 아니다. 다양한 외력으로 인해 그런 육아를 할 수 없을 뿐이다.
    p340.
    여기서 인스타그램 육아와 엄마의 순교 사이에 공통분모가 발견된다. 이것들은 사실 죄다 일이다. 처음엔 어머니의 삶을 정신없지마 살 만한 것처럼, 언제나 아름답고 수월한 것처럼 표현하면서 - "육아는 대단한 모험이야!" - 일을 지운다. 그런 다음 일을 하지 않는 건 문제이므로, 실제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자기 자신, 배우자, 가족과 동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강조한다. 모순이다. 완벽한 육아와 분통터지는 희생에 더해 그 모순마저 관리하느라 일은 더욱더 늘어난다.
    p353.
    빈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지적 부담'을 가한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인생의 기본적 요소들을 찾아내고 유지하느라 너무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쏟아 부은 나머지 공부하고, 저축하고, 야학에 등록하고 출석하는 데 사용할 에너지가 바닥난 것이다.
    p354.
    가난한 부모들은 번아웃에 '도달'하지 않느다. 애당초 번아웃 상태를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p356.
    돈은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악화된 번아웃의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증상 완화는 완치와 다르다.
    p367.
    피로와 억울함과 말할 수 없는 분노를 줄이고 싶다면, 가장 비호감인 버전의 자신으로 추락하고 싶지 않다면, 당신은 행동해야 한다. 투표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뿐 아니라, 당신과 비슷하게 생겼고 비슷하게 말하고 비슷하게 행동하고 비슷한 가족을 가진 사람들뿐 아니라, 모두를 위해 삶을 더 낫게 만들 해결책들을 지지해야 한다.

     

    맺음말. 잿더미에 불을 지르시오

     

     

    (★) 이 책을 읽으며 맞다 라고 맞장구를 계속 치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현상을 정확하게 짚어주고, 어쩌면 이런 상황에 놓인 우리가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해주는 점은 좋지만,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부모가 아니지만, 9장의 엄마들 이야기는 심히 공감이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직장에서 죄책감에 시달리며 일하고 있는 워킹맘들을 너무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육아가 엄마의 몫은 아니지만, 일하는 엄마들처럼 일하는 아빠들이 죄책감을 내비치는 것은 본 적이 드물다. 어쩌면 내색을 안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아이들이 자라는 사이에 엄마의 손길이 아빠의 손길보다 더 당연하다는 우리들의 편견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타인의 시선으로... Omniscient P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