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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4. 탱자
    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5. 27. 10:57

    봄날의 책 / 한국산문선

    근현대 산문 대가들의 깊고 싶은 산문 모음

    박미경 엮음

    [1]

    오규원

    한 양종(洋種) 나팔꽃과 함께 (양종 : 서양의 계통)

    p12.
    아침의 햇살은 보기보다 음흉하여 웃으면서 우리들 감각의 제일 약한 부분을 간질이기 마련입니다.
    p15.
    내가 아침을 먹을 시간쯤이면 이 양종의 꽃은 벌써 내가 앉은 마루에 아라베스크의 무늬를 내 머리 위에 떨어뜨립니다. 이 흔들거리는 아라베스크 무늬 아래서 수십 혹은 수백의 화폐 단위가 아닌 그저 백원 단위의 한 꽃씨를 키우는 가난한 자의 행복을 나는 아침마다 누립니다.

    탱자 나무의 시절

    p17.
    탱자꽃이 지고 나면 꽃이 진 자리마다 녹색의 탱자 열매가 별처럼 수북하게 열렸다. 그 별들이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면 무슨 기적처럼, 작은 황금빛 태양이 되어 탱자나무 가지마다 가득 떠올랐다. 어느 누가 저렇게 많은 태양을 한꺼번에 떠올릴 수 있단 말인가? 그 많은 태양을 볼 때마다 혼자 흥분한 나는 탱자나무 울타리 밑에 쪼그리고 앉아, 그 많은 태양을 잡히는 대로 따서 주머니에 넣으면, 그 시절을 행복해했다.

     

    김지연

    부덕이

    p22.
    얼마 후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고 남아 계신 할아버지한테서 소식이 왔다. 부덕이가 돌아왔다고. 세상에나! 시골집에서 광주는 삼십리가 넘는데 도시의 복잡한 지리를 어떻게 알고 다시 돌아갔다는 말인가.

     

    김서령

    사과

    p25.
    나는 행복한 사람이지만 언제나 똑같은 뉘앙스로 행복한 건 아니다. 행복하다는 걸 느끼지 못하는 순간도 많다. 희마잉 없다고, 지금껏 잘못 살아왔다고, 곁에 손 내밀 사람 아무도 없다고 착각하는 날도 종종 있다. 그럴 때 나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스스로에게 일깨워줘야 할 필요와 의무를 느낀다.
    p27.
    작은 생명을 오래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은 평화다. 신비다. 명백한 행복이다.

    과꽃이 피었다

    p30.
    살아가면서 공짜로 얻는 게 너무 많다. 그걸 알고 나는 매번 놀란다. 세상만사 공짜는 없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알고 보니 내가 얻는 건 모조리 무상이다. 하늘빛, 나무 냄새, 괜히 손등에 날아와 앉는 나비와 잠자리, 밤이면 떠오르는 별들, 한 달에 스무날은 잠든 머리맡을 스쳐 지나가는 달빛, 잊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결......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자꾸 깊어간다.

     

    유소림

    발자국

    p33.
    동요란 그것을 부르는 어린 시절보다 오히려 그 시절을 까마득히 떠난 후의 어느 팍팍한 날을 위한 노래다.
    p34.
    눈은 비와는 달리 쌓여서 '흔적'을 만든다. 눈은 누군가가 떠나고 나서도 차마 다 가지 못하고 뒤에 남기는 가냘픈 눈짓을 간직할 줄 안다. 흔적은 '족적'과는 다르다. 시멘트 콘크리드 위에 쾅 눌러 찍은 것이 족적이라면, 조금씩 사라지다 영영 가버리는 눈 위에 소리 없이 남겨진 발자국은 흔적이다. 흔적은 애달프면서도 평화롭다. 조금씩 사라져 가기에 애달프고 족적처럼 악착스레 매달리지 아니하기에 평화롭다.

    산 것들, 죽은 것들

    p36.
    그러나 생명이란 이상도 해서 정자와 난자가 생며잉 되는 순간 오장육부와 사지육신뿐 아니라 기쁨이나 슬픔, 두려움이며 그리움, 소망 따위의 '불순물'이 줄줄이 생겨난다.
    더구나 사람의 '불순물'은 전염성도 강하다. 이것이 사람 사이에 전염되면 지옥도 생겨나고 천국도 생겨난다.
    p37.
    우리는 어째서 낙엽이나 마른 나무 열매처럼 이미 죽어버린 것들과 애시당초 생명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돌멩이 따위에게도 다정함을 느끼는 걸까.
    p38.
    산 것들 죽은 겨울, 산 것들 잠든 한밤에 깨어 있으면 귀가 맑아진다. 그런 밤에 ㄴ살아 있는 것들의 아우성만 들을 수 있던 우리들 귀에도 지나온 길에 만났던 무수한 것들과 나의 옛 동무들의 말소리, 나 죽어 머지 되어 다시 돌아갈 내 고향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윤후명

    나무의 이름

    p41.
    숲으로 가면 나무 이름을 모르는 게 안타깝다. (중략) 자신감이 없는 것이야말로 나무들에 대한, 숲에 대한 결례라는 생각이 든다. 친한 터수로 오래 만나는 사람인데, 정작 이름은 모르겠다는 경우와 같다. 어정쩡 만나는 사람을 어떻게 깊이 만날 수 있을 것인가.
    p43.
    누구는 이제 봄이 없다고도 머리를 흔들지만, 나는 꽃과 함께 계절을 정돈한다. 꽃과 나무에는 이름이 있다. 그 이름과 함께 나는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을 기억하고 정리한다. 또박또박 삶의 이름을 적어놓는다.

    보라빛 꽃을 손에 들고

    p46.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보랏빛 꽃을 손에 들긴 하지만, 모든 꽃에서 정령을 보고자 하는 나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장석남

    아주 조그만 평화를 위하여

    p49.
    그러그러한 색깔에 당신이 그리워져 가슴 아래께가 먹먹해집니다. 이 아름다운 빛이 갑자기 마음 속으로 들어와서 먹먹한 피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환한 빛입니다.

    가만히 깊어가는 것들

    p51.
    밤이 깊으면 병인 듯 이런저런 먼 곳의 일들이 궁금해진곤 합니다. 먼 곳의 빛과 소리들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밤이므로 길을 나설 수는 없습니다. 그저 창 앞을 서성이며 그러게 그리워할 뿐입니다. 어쩌면 그곳은 내 발길이 닿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인지도 모릅니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그리움만이 갈 수 있는 그런 곳 말입니다. 당신을 마난고 온 지 벌써 오래입니다.
    당신 곁을 흐르던 강물은 여전하겠지요.
    p53.
    가만히, 내 마음으로부터 당신의 마음속으로 깊어가는 것이 또한 있습니다. 달은 내 그러한 관념의 마을을 넘어서 마침내 당신에게 가 닿을 것입니다.

     

    [2]

    오정희

    나이 드는 일

    p58.
    간신히 꺼낸 짧고 무심한 대화에서 보이는, 어울리지 않게 진지하고 커다란 반응에서, 나는 이 순간 우리가 서로에게 다정해지고 친절해져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래, 우리는 빈 둥지의 쓸쓸함과 나이 들어가는 일의 스산함, 서로의 늙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서글픔에 대해 따뜻이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은 것이다.
    p59.
    침묵으로 이어지는, 햇빛 있는 동안의 오후 시간은 아쉽도록 짧으면서도 정체 모를 막연한 불안감과 초조감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지루하게 흘러간다. 
    어린아이와 젊은이들이 없는 집에는 일찍 어둠이 찾아 든다. 어둠이라는 물리적 현상과 적막감이라는 심리적 상태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빛깔로 집은 깊게 가라앉는다.

    낙엽을 태우며

    p64. 
    아름다운 계절이 가고 있다.
    누군들 다음 해의 가을 역시 이와 같으리라고 범연할 수 있을까.

    * 범연 : 범연하다. 차근차근한 맛이 없이 데면데면하다.

     

    박완서

    트럭 아저씨

    p68.
    이 나이에도 가슴이 울렁거릴 만한 놀랍고 아름다운 것들이 내 앞에 줄서 있다는 건 얼마나 큰 복인가.
    p71.
    어렸을 적에 읽은 그 한권의 책으로 험하고 고단한 일로 일관해온 중년사내의 얼굴이 그렇게 부드럽고 늠름하게 빛날 수 있는 거라면 그 책은 걸작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그의 덕담을 고맙게 간직하기로 했다.

     

    함민복

    찬밥과 어머니

    p78.
    밥이 식은 시간만큼 어머니도 달빛에 젖어 아버지와 나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중략)
    그날 찬밥이 차려진 밥상에는 기다림이 배어 있었다. 짠 된장국이 다디달아 자꾸 찍어 먹던 밤, 지붕 낮은 우리 집 마당에는 달빛이 곱게 내렸고, 세 식구가 앉아 있는 쪽마루에는 구절초 냄새와 더덕 향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죄와 선물

    p83.
    뱀은 내가 수없이 제 집 위를 밟고 지나도 나를 물지 않았었는데 나는 뱀을 보자마자 공격했으니......

     

    김화영

    이삿짐과 진실

    p90.
    이삿짐은 쓸쓸하고 적막해보이지만 벌거벗은 삶의 진실을 손가락질 해준다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꿈을 깨뜨리기도 하지만 우리를 헛된 오만으로부터, 부질없는 확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법정

    탁상시계 이야기

    p93.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왜 하필 나와 마주친 것일까. 불교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시절인연이 다가선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물건과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 중에 하나가 내게 온 것이다.
    p95.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정현종

    메와 개똥벌레

    p99.
    사실 사람이 힘을 내는 것은 다 남의 살 덕분이고, 그러니 사람의 살이란 게 다름 아니라 두루 남의 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좋다. 윤회전생(輪廻轉生)이란 그러니까 만물의 구성원리에 다름 아니다.
    p100.
    우리 일생의 시공 중에서 어린 시절의 시공만큼 넘치는 시공이 없다는 거야 말할 것도 없는 노릇이지만, 어린 시절을 꿈꾸는 동안이란 다름 아니라 희생의 시간이며, 우리를 유례 없는 서늘한 공간으로 풀어놓음으로써 생의 감각을 원칙적으로 회복케 하는 신묘한 시간이다.

    재떨이, 대지의 이미지

    p106.
    바라보는 일은 그것 자체로서 완전한 행동이다. 그리고 마음의 평정 속에서 바라보는 일은 가장 아름다운 일 중의 하나이다. 바라보는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권정생

    목생 형님

    p116.
    역사는 잔인하지만 생명은 아름답다.
    p118.
    살아 있는 것은 무형의 그림이다. 그것이 더욱 또렷이 내 마음속 깊숙이 향기를 뿜으며 생동하고 있는 한 나는 덜 외로울 수 있다. 다 잃고 난 다음에야 우리는 소중한 한 가지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3]

    김영태

    풍경 E 베니스에서의 죽음

    p125. 
    무엇과 무엇을 결부시켜보는 것이 나의 주무기라 하더라도 아니, 타지오 정도의 신비스러움, 우아함, 비수(悲愁)를 설사 아이가 못 지녔다 해도 나는 타지오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기와 햇볕, 실내의 분위기, 간섭없는 하루하루의 전권을 아이에게 부여하고 싶다.

    풍경 F 애칭(愛稱)에 대해서

    p127.
    내가 보기에 아호는 애칭보다 좀 불편하다. 누구나 손쉽게 부를 수 있는 애칭에 비해 호는 그렇지 않다.

     

    강운구

    어디에 누운 것인가

    p133.
    여름 저녁은 길다. 해가 늦게 지기도 하지만 뉘엿뉘엿 폼 잡으며 천천히 어두워진다. 그러나 겨울엔 해가 꼴깍 넘어가고 나면 금방 캄캄해진다. 낯선 곳에서는 이골이 난 떠돌이라 한들 그럴 땐 마음이 먹먹해진다. 문득 귀소본능이 발동해 저자의 불빛이 그리워진다.

    길에서 길을 잃다

    p138.
    '반만 년의 역사, 그 빛나는 전통과 일'을 내세우길 좋아하면서도 그 곁을 획획 달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황병기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p141.
    음악은 공기 중에 일어나는 파동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사라져버린다. 음악처럼 철저하게 덧없는 예술은 없을 것이다. 
    p142.
    가치 있는 것은 불변해야 된다고 하지만,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것들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금선(琴線)을 울릴 때가 많다.

     

    신영복

    나의 숨결로 나를 데우며

    p148.
    그 번득이는 빛 속에서 냉철한 예지의 날을 세우고 싶다. 

     

    안규철

    어린 시절 창가에서

    p152.
    나는 세상을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세상이 하나의 책처럼 읽을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놀라운 책은 읽고 또 읽어도 항상 새롭고 끝이 없었다.

    그릇들

    p154.
    그릇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악기의 삶을 사는 것은 그들의 일이다.

     

    [4]

    윤택수

    훔친 책, 빌린 책, 내 책

    p159.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라는 말이 있다.
    p161.
    책은 정신적인 물질이라서 그에 따른 곁가지가 여러 갈래로 옴작거리고 있다. 훔쳐라. 정신적인 물질이라고 했을 때에, 그 '정신'을 날렵하고 완전하고 아름답게 훔쳐 버려라.
    p164.
    찰스 램의 인간 분류법은 간명하고도 유쾌하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는데, 빌리는 사람과 빌려주는 사람이로다.
    p166.
    내가 쓸 책이야말로 내 책이다.

     

    김용준

    구와꽃

    p170.
    더군다나 훨훨 자유스럽게 넓은 화단에 피지도 못하고, 제법 값 높은 화분에나 좋은 흙에 담기지도 못했건만, 깡통 속에서 자배기 쪽 속에서 오히려 아무런 불평도 없이 낭만(浪漫)하게 자유스럽게 그 개성을 충분히 발휘하는 이 꽃을 나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두꺼비 연적(硯滴)을 산 이야기

    p174.
    나의 고독함은 너 같은 성격이 아니고서는 위로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태준

    p178.
    벽이 그립다.
    멀찍하고 은은한 벽면에 장정 낡은 엣 그림이나 한 폭 걸어놓고 그 아래 고요히 앉아 보고 싶다. 배광(背光)이 없는 생활일수록 벽이 그리운가 보다.

    고독

    p180.
    얼마나 쓸쓸한가!
    무섭긴들 한가!
    무섭더라도 우리는 결국 이 요요적적(寥寥寂寂)에 돌아가야 할 것 아닌가!

     

    백석

    해빈수첩(海濱手帖)

    p188.
    바다에 놀래이지 않는 그들인 탓에 크면은 바다로 나아가여야 하는 바다의 작은 사람입니다.

    동해

     

     

    이상

    산촌여정(山村餘情) - 성천 기행 중의 몇절

    p210.
    근심이 나를 제한 세상보다 큽니다. 내가 갑문(閘門)을 열면 폐허가 된 이 육신으로 근심의 저수가 스며들어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탱자 향이 훅 하고 끼치기를 - 엮은이의 말

    p214.
    그런데도 이 짧은 산문들은, 어떤 소중한 것들에 반응하는 우리의 감각을 일깨웁니다.

     

    (★★)
    생각보다 접하기 힘든 분들의 산문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원래는 지인 선물을 사서 드렸는데, 나도 읽어보고 싶어져서 따로 구매한 책이기도 하다. 정리하다보니 한번 더 읽고 업데이트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조만간 다시 읽어봐야겠다. 두번 읽고 다시 정리하니 생각대로 오타가 많아 수정했다. 그리고 다시 읽으니 좋네.

타인의 시선으로... Omniscient P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