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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문 뒤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5. 17. 10:27
김미희
p7.
이건 현실이 아닌데 울면 현실이 돼버릴 것 같았다.p22.
살아왔던 어느 날보다 그이가 아팠던 날들 동안 삶이 더 간절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먹었으면 했고, 통증이 덜해서 잠시라도 일어나서 걸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가 아프기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했던 일들을 조금이라도 다시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을 못 자 늘 피곤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으면서도 그랬다. 삶이 얼마나 간절해질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가 내게 남겨준 큰 선물이었다.p37.
똑같은 하루를 살다보면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몇년의 시간이 스르륵 가버린다. 한순간을 기억에 남기고 싶다면, 그만큼 특별한 장면을 만들어야 한다. 허무하게 사라지는 시간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그뿐이다. 잡고 싶은 특별한 순간은 나 혼자일 때가 아니라 우리일 때다.p40.
당신이 내게 남긴 게 하나 더 있어. 그건 바로 죽는 순간의 모습이야 나도 당신처럼 죽게 될테니, 지금의 삶이 두렵지 않아.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날 테니까. 아니 사실 두려워. 삶에 질질 끌려 다니다 죽게 될까봐.p48.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고, 죽고 난 후 무엇이 남는지도 모른다. 죽은 뒤 아무것도 없다면, 삶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할까? 죽음에 대해선 살아있을 때 생각해놓아야 한다. 죽음에 임박해서 생각하긴 어렵다. 죽음을 피할 순 없지만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결정할 수 있다.p53.
한번에 받아들이기에 너무 큰 고통은 처음에는 다른 사소한 감정으로 대체된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진짜 고통이 된다. 이별의 슬픔도 그렇다. 처음에 실감하지 못했던 이별이 한참 뒤에야 현실이 되어 나를 울게 한다.p81.
친엄마는 가난 때문에 나와 동생을 키우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새엄마는 우리를 키워주셨다. 그 차이가 뭘까? 사랑, 책임감, 의무감? 친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새엄마는 나를 사랑했을까? 잘 모르겠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새엄마가 30년 넘게 미싱을 돌렸다는 것뿐이다.p106.
돌이켜보면 결혼은 하자마자 임신한 것이 참 다행이다. 아기가 태어나고 1년 후 남편은 신장암 수술을 받았다. 어떤 타이밍은 인생 전체를 바꿔놓는다.p121.
한 손은 아이를 잡고 한 손은 그이를 잡고 있었다. 한 손은 탄생에 가깝고 한 손은 죽음에 가깝다. 어쩌다 나는 이 인연 사이에 들어와 있을까? 감상적인 생각은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그 둘을 힘껏 잡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p131.
지난 몇년 동안 친구를 사귀는 건 생각도 못했다. 남편이 내게 오랜 친구이자 애인이었다. 그런 사람이 떠나고 나니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공허했다. 이제는 내 나이가 너무 많게 느껴져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 듯 하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고 만나도 친해지는 일이 번거롭다. 애쓰지 않으면 친구를 사귈 수 없다. 어린 아이의 단순함을 배우고 싶다 사람 사리 마음을 주고 받는다는 건 뭘까. 어쩌면 아이가 나보다 친구 사귀는 법을 더 잘 아는 것 같다.p192. (2014.12.4)
지난 주에 담당 의사를 만났다. 내가 남편의 병에 대해 여러가지를 물으니 나를 따로 불렀다. 한달 뒤에 환자가 자기를 보러 오지 못해도 놀라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이는 살아 있는데 병원에서는 죽은 사람처럼 대한다. 주저 앉아 울고 싶지만 나는 하율이 엄마다.2015.07.10 장례
p198. (2015.10.8)
남편이 죽은 지 석달이 되었다. 아파했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나는 밤에 잠을 못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가슴을 두들겨 맞은 듯하다. (중략) 나는 울 수 없다. 혼자 조용히 누워 있고 싶은데 해야할 일이 왜이렇게 많은지. (중략)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껏 살아온 방식이 모두 무너지고 어둠속을 더듬는다. 그래도 아이가 있고,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엄마를 보내고 난 뒤의 아빠의 마음을 대신 읽은 것 같다. 물론 우리는 다 컸고, 아빠는 나이를 먹었지만, 배우자의 상실이라는 감정은 간접체험하는 나마저도 오열하게 만들었다. 부디, 지금은 아이와 함께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며 한발짝 나아가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