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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2. 발해고
    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4. 30. 12:51

    유득공

    유득공과 발해고

    p18.
    그는 역사가라기보다는 시민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의 역사 인식은 문학론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북학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서는 고금과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문학 작품들을 섭협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런 가운데 우리 역사와 관련된 사료에도 주목하게 되었다.
    p21.
    그가 북방의 역사에 주목하게 된 것은 나약해져 버린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p28.
    그가 사학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서문에 나타난 혁신적인 발해관 때문이다.

     

     

    성해응의 서문

    p36.
    공께서 정력을 쏟아 고증하고 연구하던 이 책을 지은 것은, 본디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성정에서 비롯된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자세히 검토하여 국가를 세워 운영해갔던 뜻을 이해하게 된다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정책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않을 터인데, 이를 알아주는 사람이 극히 적어 함부로 버려지게 되니, 실로 애석한 일이다.

     

    박제가의 서문

    p39.
    또한 이 책이 어찌 일개 국가의 문헌으로만 가치를 논하겠는가, 중국의 호회, 마령이 지은 책과 그 장단점을 함께 비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유득공의 서문

    p40.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한 일이다.

     

    발해고

    p48.
    고왕의 이름은 조영으로 진국공의 아들이다. 일찍이 고구려 장수가 되었는데 아주 용맹스러웠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다. 
    p70.
    이로 보건대, 발해는 일찍이 멸망하였던 것이 아니다. 부유부 영부왕에 대해서 비록 성과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으나, 태종의 조서를 보니 그가 대씨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발해가 언제 멸망하였는 지는 알 수 없다.※
    ※ 발해가 926년에 멸망하고, 그 뒤에 부흥운동이 금나라 초기까지 일어났던 사실을 서로 혼동하였기 때문에 이런 판단을 하게 되었다.

     

    (★)
    짧은 발해의 역사. 국사책에서만 읽었던 발해고를 찾아서 읽어보는 일은 그냥 호기심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궁금한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짧지만 어려운 내용이었다고 하고 싶다.

타인의 시선으로... Omniscient P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