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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4. 4. 15:15
엄마를 보내고, 기억하며
이상원
p15.
엄마에게 여행은 일상을 떠나는 새로운 경험을 의미했던 것 같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것을 접하는 경험도 중요했지만 살림을 하고 밥을 하는 그 일상에서 잠시라도 떠난다는 점이 더 중요했을지 모른다.p25.
밥하는 일에는 은퇴가 없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은퇴하고 책임과 의무에서 해방되어 연금을 받게 되었지만 엄마의 두 손에는 해방도, 연금도 없었다. 오히려 밥할 일이 더 늘어난 셈이었다.엄마는 실수도 잘 안하는 꼼꼼한 성격이었다. 그런 성향의 사람에게는 실수 연발인 다른 식구들 모습을 참고 넘기기가 힘든 일일 텐데 고맙게도 엄마는 잔소리가 많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인데 떠들어봤자 무슨 소용이니?"라는 게 엄마 생각이었다.
엄마가 어떻게 틀니를 끼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 이후 난 늘 미안했다. 엄마는 둘째인 나를 출산한 직후 잇몸이 극도로 약해져 이를 지탱하지 못했고 결국 틀니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엄마 뱃속에서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유학생의 아내로 충분히 잘 먹지도 못하면서 두살 위 언니를 돌보고 임신 기간을 견뎠던 엄마 몸에서 너무 많은 양분을 빼냈던 것이다. 엄마는 서른한 살에 나를 낳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서른한 살이 얼마나 젊은 시절인지 느끼게 되자 나는 더욱 엄마한테 미안했다.
"난 엄마 없이 어떻게 살지 모르겠어."
"다 살 수 있어."
"난 아직 준비가 안됐다고."
"준비가 됐다 싶은 때는 없어."
울음 섞인 내 말에 엄마는 침착하게, 마치 남의 일인 양 대답했다. 그리고 난 거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10년, 20년이 더 흐른 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해도 난 준비가 안 된 상태일 테니까.p106.
그리고 나는, 일하는 사람이 필요 없다고 말했던 나는, 당연히 혼자서 모든 일을 다 떠맡아야 하는 조재, 힘들다고 말하거나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내 여름 방학은 오롯이 엄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되었다.췌장암은 통증으로 유명한 병이다. 통증 때문에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 투병해야 하는 병이라고들 한다. 처음에 췌장암 진단이 나왔을 때 내 제일 큰 걱정도 언제 등장할지 모를 통증이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엄마는 끝까지 통증이 없었다 하루 정도 복통이 있었을 때 통증이 시작되는가 싶어 잔뜩 겁을 먹었지만 일시적이었다. 의사 설명으로는 척추 전이인 경우 통증이 극심한데 엄마는 간 전이여서 통증이 없는 거라고 했다.
p115.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은 내게 있다. 하지만 암 진단을 받은 순간 그 결정권은 조각조각 나기 일쑤이다. 한 조각은 의사에게, 다른 조각은 배우자에게, 다른 조각은 자식들에게, 그 중 전문가는 의사 하나다. 전문가는 매뉴얼대로 치료법을 제안한다. (중략) 다른 한편 배우자나 자식들은 대부분 전문가가 아니다. 하지만 결정권을 행사 하려 든다. 환자 본인은 병의 고통 때문에, 혹은 심리적 충격 때문에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p123.
친구들끼리 즐거이 주고받는 대화는 늘 삶을 전제로 한다. 지금 어떤 고민과 걱정이 있는지 털어놓는 말은 그 고민과 걱정이 해결될 미래를 향한다. 언제 어디서 모여서 뭘 할지 의논하는 얘기도 미래의 어느 순간 모두 밝은 얼굴로 마주 볼 수 있다는 가정하에 가능하다.p124.
심심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엄마의 그 시간은 어쩌면 죽음 아펭서 거쳐야 할 통과의례일지도 몰랐다. 예전에 나는 시한부 선고를 받더라도 평소와 다름없이 살다 가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건 비현실적인 생각이었다. 죽음이 코 앞에서 기다린다는 것을 아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기 때문이다. 우선 내가 달라진다. 삶에서 중요했던 많은 것들이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남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그리하여 결국 엄마를 돌보는 일은 내 차지가 되었다. 가족들은 점차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각자의 일상을 영위했다. 나는 그 배려 없음이 섭섭했고 간혹 분통이 터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엄마를 위한 희생과 자기 일상 사이의 균형점을 어디에서 잡는지는 각자의 선택이고 정답은 없다는 것을. 나는 자식들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 선택일 뿐 강요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8월 8일에 좁쌀미음과 간장게장으로 마지막 식사를 했다. 그리고 9월 9일에 가실 때까지 한 달 동안 곡기를 끊은 채 버텼다. 물, 식혜, 야채주스 등을 몇 모금씩만 마실 수 있었다. 엄마는 점점 작아지고 가벼워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p162.
엄마는 촛불이 꺼지듯 떠났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서서히 조금씩 타들어간다는 것을 옆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동병상련.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된 나는 글을 읽는 내내 작가의 문장 하나하나가 허투루 보여지지 않았다.
어느날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가족들이 아픈 사람을 두고 보이는 의견차나 다툼들. 그게 왜 그럴까 했었는데, 막상 본인도 비슷한 상황에 놓이니 이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암이 착한 병일 수 있다고 한다. 적어도 대략 언제 죽는지는 미리 알려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건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다를 것 같다. 나와 엄마에게는 참 잔인한 시간이었다. 무엇을 해도 바뀌지 않는 미래를 하루하루 버텨야 했으니까. 어떤 노력으로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고, 고통은 심해져가는 당사자에게는 더 괴로운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건강한 순간에 가족과 소중한 주변인들과의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엄마가 가고, 나도 한동안은 엄마와 다녔던 장소들에서 엄마와의 추억을 곱씹으며 나 자신을 다독일 수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작가님이 부럽다. 나도 엄마랑 남미라도 다녀왔다면 더 좋았을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