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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공정하다는 착각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3. 21. 23:09
마이클 샌델
<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
p13.
그런데 만일 대학 학위가 좋은 직장과 사회적 평가의 전제조건이 된다면, 이는 민주주의를 부패시킨다. 이것이 능력주의의 어두운 이면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학위를 갖지 않은 이들의 사회적 기여는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한다.p15.
내가 가진 재능과, 사회로부터 받은 대가는 과연 온전히 내 몫인가? 아니면 행운의 산물인가? 나의 노력은 나의 것이지만, 그런 노력은 패배자도 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재능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한 운이다. 나의 노력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는 사회를 만난 것도 내가 시대를 잘 만난 행운의 결과인 것이다.<본문>
p48.
세계화는 그 과실을 불균등하게 배분했다.p51.
노력과 재능 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는다. 기회 균등에 대한 담론이 과거와 같은 반응을 얻지 못하는 이유라 볼 수 있다. 사회적 이동성은 더이상 불평등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다. (중략)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p53.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 만하다는 것이다.p88.
그러나 선한 것과 위대한 것이 꼭 연결되지는 않는다. 사람이든 나라든 정의로움은 정의로움이고, 부와 권력은 부와 권력이다. 역사를 조금만 살펴봐도 강대국이 꼭 정의롭지 않으며, 도덕적으로 존경할만한 나라들이 꼭 강력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p135.
희망과 팩트를 뒤섞는 이런 어법은 승리와 패배의 의미가 뭔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능력주의가 나아갈 이상에 대한 야심을 나타내면, 패배자는 시스템을 비난하게 된다. 그러나 능력주의가 주어진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패배자는 스스로를 비난하도록 요구받게 된다.p145.
이것이 능력주의의 약속이었다.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 가능성의 약속 말이다.p199.
먼저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중략)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건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다리의 단과 단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문제가 안된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p222.
시장 수요에 부응한다는 건 단지 사람들이 우연히 갖게 된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욕구 충족이 윤리적 중요성을 갖는냐는 확실히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러한 문제의 해답은 경제 분석으로 마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재능 문제를 제쳐두고라도, 사람들이 소비자의 선호에 부응해서 벌어들인 돈이 능력이나 도덕적 자격을 반영한다고 보면 잘못이다. 그 윤리적 중요성은 경제 모델로는 설명 불가능한 도덕적 고려에 좌우되는 것이다.p263.
대신 오늘날의 학력주의적, 전문직업인 위주 계층은 그들의 특권을 어떻게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을 지 감을 잡고 있다. 그것은 자녀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상속해주는 방법이 아닌, 능력주의적 사회에서 성공을 결정하는 입지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p282.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자다. 그러나 상처 입은 승리자다. (중략) 생각하고, 탐구하고,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해야 가치 있게 날아갈 것인가 숙소하면서 대학생활을 보내지 못하고, 싸우고 또 싸운다. 놀랄만큼 많은 아이들이 정신 건강에 이상을 겪고 있다.p283.
완벽주의는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병폐다.p285.
캄핑문화의 등장은 대학이 경쟁적 능력주의의 기초훈련장과 같아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교육의 목표와 수단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중략) 학력을 부여하는 역할은 이제 너무 커져서 교육을 수행하는 역할을 덮어버렸다. 선별하고 분투하는 일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넘어버렸다.p308.
능력주의 시대는 노동자들에게 더 악랄한 상처를 입히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의 존엄성을 깎아내리고 있는 것이다.p315.
다른 곳에서는 점잖게 행동하는 엘리트들(대체로 진보 성향)은 자신도 모르게 노동 계급 백인을 낮춰 보는 태도를 취한다.p320.
"실직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뜻이지요" 그는 설명했다. "일이 없는 사람은 동료 시민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됩니다. 그것은 랠프 앨리슨이 쓴 <투명인간 - The Invisible Man>이 현실화되는 것이죠"p322.
우리의 소비자 정체성과 생산자 정체성 사이를 조화시키는 일은 정치의 몫이다.p327.
스미스, 케인스, 그리고 여러 형태의 경제학자들과 다르게 헤겔과 뒤르켐은 일이 소비만을 위한 수단이라고 여기지 않았따. 대신 그들은 '일은 그 최선에 있어 사회적 통합 활동이며 인정의 장이고,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우리의 책임을 명예롭게 수행하는 방식'이라고 보았다.p329.
이것은 글로벌, 능력주의적, 시장 주도적 시대의 관념론이다. 승자에게 아첨을, 패자에게 모욕을 던지는 관념들.p342.
능력주의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이를 먹으면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금수저부터 흙수저까지. 물론 사람은 노력을 하겠지만, 뒷받침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도달할 수 있는 범위는 달라지지 않을까? 똑같은 노력을 하는데 청바지를 입고 뛰는 것과 러닝복을 입고 뛰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일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교육의 역할이 중요하다. 가난하다고 해서 정보의 접근에 제약이 생겨서는 안된다. 그런 의미로 어른들이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다. 어른들은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나 조차도 무언가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나라에서 항상 일어나는 특권층(?)의 자신들의 입시 비리가 떠올랐다. 무언가 잘못이 있음에도 없다고 우기거나 잘못이 마치 잘못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모순적인 모습. 만약 당신이 아닌 당신의 경쟁자의 자식에게 같은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비난하지 않고 두둔할 것이냐고 물어보고 싶다.
계급사회가 아닌 민주사회라고 하지만 여전히 계급이 나눠져 있는 것 같다. 평등하지 않은 것 같다. 공정하지도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사는 게 참 불편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