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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경주, 여유로운 도시글쓰기방/먹고 마시고 2024. 3. 15. 12:23
과거로의 여행이 이런 것일까?
이래서 기록의 중요성이 언급되는 것 아닐까 싶다.
사진 없는 경주 여행 일기...<여행 기간 : 2006.07.28 ~ 2006.07.30>
떠나는 저녁,
폭우가 쏟아졌다. 모두들 미쳤다고 했다. 미쳤다고 해도 떠나야 했던 것이니 나는 간다고 했다. 다만 후배가 걱정이 되었다.
"돌아가도 되요.."
후배는 괜찮다고 했다.
우리는 영화를 보지 못했고, 대신 별다방에 앉아서 수다를 떨었다. 11시가 가까이 오면서 설레였고, 또 설레였다. 수원역에서 기차는, 대학교 1학년 이후로 처음 타보는 것이었다. 역은 많이 바뀌었지만, 설레임은 예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무궁화 호에 사람들은 많았다. 미리 예매하지 않았다면 입석을 했어야 하는 지 모른다. 가족 단위 여행이 많았다. 아기들의 웃음소리, 울음 소리.. 잠자기에 좋지 않은 환경이지만, 자고 또 잤다. 우리는 아침부터 석굴암을 올라가야 했으니까.
새벽 3시 48분, 경주역에 도착했다. 비는 오지 않았다. 다만, 하루 푹 찌는 날이 되리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무척이나 무더운 날씨가 예상되었다. 새벽부터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에, 우리는 잠깐의 고민을 하고, 찍어둔 찜질방으로 택시를 이용해서 이동했다. 찜질방을 이용하지 않았기에, 저렴한 가격으로 사우나를 이용할 수 있었다.
6시가 좀 넘어서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근처 김밥집에서 김밥과 김치 찌개로 아침을 채우고, 황성 공원을 가로 질러, 경주역으로 갔다. 이 불편한 상황을 아무 말없이 따라와 주는 후배가 고마웠다.
도착한 뒤에,
경주역에 도착해서는 짐정리를 했다. 수원에서 폭우가 쏟아졌으나, 경주는 땡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우리의 운동화는 나름 뽀송해져서, 신을 수 있었다. 소다의 영향인지, 화장지의 능력인지 모르지만, 즐거운 여행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이 되었다.
11번 버스를 타고 불국사를 향했다. 가는 길 중간에 통일전과 화랑 교육원이 있는 남산을 바라봤다. 일정상 남산은 못돌 듯 하여, 유심히 봐두었다.
불국사 정거장에 도착해서,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올라가는 길에 기념품 파는 할머니에게, 기념품 수건을 샀고, 잠시 우산을 맡겼다.불국사보다 시원할 때 석굴암을 돌아보라는 할머니 충고대로 우리는 석굴암을 향해 갔다.
석굴암까지는 3.2km였다. 우리는 각자의 무거운 짐이 있어서, 힘들게 올라갔다. 중간에 쉬엄쉬엄 갔지만, 정상에 올라갔고, 정거장에 버스들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실 쉬운 길은 있었지만, 우리가 일부러 어려운 길을 택한 것이다.(정확히 말하면, 나는 쉬운 길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 종은 나중에 보니, KBS 방송국의 무슨 장면에도 나왔던 것이다.
아하~, 내가 기분 좋게 사진 찍은 곳이 이곳이구나 하는 생각에 신났다.
석굴암의 매표소에서 입장료에 경악을 다시 하고, 문화재를 위해서 내가 쓰겠다라는 마음으로 입장했다. 다만, 너무나 상업적으로 변해버린 모습에 씁쓸했다. 선조들은 정확한 기준치로 자연암을 만들었는데, 일본에 의해서 그 자연스러움이 붕괴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석굴암 안에는 열혈 어머니들의 불공을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니, 멀리 바다가 보였다. 또한 기와에 다양한 나라의 사람이 정성스레 소원을 쓴 것도 보였다.
불국사에서는 여기저기 절을 둘러보며, 교과서에서 봤던 석탑, 다보탑, 석가탑을 만났다. 네마리 사자에서 한마리밖에 남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경주 시내에 가서 배고픔을 해결하기로 합의 본 우리 둘은, 민박집에 짐을 맡기고 이동하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선택한 민박집으로 이동했다. 민박집 대문을 들어가는데, 마치 시골집에 온 듯하여 마음이 따뜻해졌다. 방은 에어콘이 틀어져 있지 않았지만, 무척 시원했다. 선조들은 그래서 여름에도 덥지 않았으리라. 시원한 물로 간단히 샤워를 한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아주머니의 추천으로, 해장국 집으로 향한 우리는, 잠들어 있는 할머니와 함께 방에서 식사를 했다. TV에 나오셨다던 할머니는, 낮잠을 곤히 주무시고 계시다가, 우리가 밥을 맛있게 다 먹고 나오는 순간, 일어나 의자에 앉으셔서 음식값을 받으셨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경주 박물관으로 갔다. 가는 길에 아이스께끼를 사먹었다. 덕분에 입안의 살점이 떨어져서 피가 났다. 흑.. 너무 차가운 경우, 우리의 살점이 붙어 버린다는 사실을 나는 간과했다. 아마 드라이아이스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피를 흘리면서 나는 박물관을 향해 갔다.(마치 귀신 같군..^^)
경주 박물관에 가서 비가 조금 내렸다. 우리는 건물안으로 들어가서 조금 앉았다. 오전에 산에 올라갔다와서인지 다리가 무척 아팠다. 후배도 정말 아파겠지? 박물관은 아이들 때문에 난장판이 되었다. 서울 박물관에서 본 금관 세트 원본을 보게 되어 너무 기뻤다. 목걸이와, 기타 등등에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술관을 거쳐 우리는 반월성을 향했다. 아직도 월성은 발굴 작업이 한창 중이었다. 꽃과 연꽃을 배경으로 한 길은 너무 이뻤다. 석빙고가 있었는데, 근처에 가니 시원한 바람이 나왔다. 들어갈 수 없었지만, 신기함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석빙고 알림 비석에 한 아이가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면 안돼"라고 하자, 아이는 내게 말했다. "난 항상 올라가, 아줌마". (이런 버르장머리, 확..)
사실, 올 때부터 후배는 남친과의 문제 때문에 고민 중이었다. 답답하다며, 잠시 통화하겠다던 후배는, 결국 전화로 다툼을 하게 되었다. 후배의 큰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잠시 담 넘어 첨성대를 구경했다. 선덕여왕의 치마 폭을 모티브로 만드었다는 첨성대, 문득 나는 궁금했다. 비가 오면 첨성대 안에 물은 어떻게 될까? 배수 시설이 잘 되어 있는 지 궁금했다. 궁금해 하는 내 등뒤로, 마차가 지나갔다.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비를 피해, 가게 앞의 평상에 앉았다. 침착을 무기로 가져야 한다고 후배에게 설교 한 뒤 택시를 탔다. 팔우정 삼거리를 삼우정으로 잘못 안 나는 아저씨에게 지도에 있는 곳으로 가달라고 했다. 무뚝뚝한 경상도 아저씨는 나에게 몰라~!!라는 매몰찬 대답만을 했고, 나는 열심히 지도를 뒤진 뒤, 해장국 거리로 가자고 주문했다. 후에 알게된 일이지만, 후배는 그런 나를 의아해 했다고 한다. 왜 아저씨는 우리에게 화를 냈으며, 선배는 그에 대해 언급도 하지 않고, 대답하기에 급급했는가? 결론은 아저씨는 화를 낸 것이 아니었다. 억양의 차이였다. 이런 사고의 차이가 다음날의 헤프닝을 가져올 줄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비가 가시고, 시장을 향했다. 순대와, 떡볶이를 샀다. 복숭아도 샀다. 물가가 생각보다는 저렴했다. 배가 부르고도 음식이 반이상이 남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오전을 힘들게 보낸 우리는 곧 잠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혹, 우리 방 앞의 우물에서 링의 귀신이 나오는 일이 없길 바라면서 말이다..
떠나기 전,
사실, 나는 눈이 6시에 떠졌다. 회사를 다니는 습관이 몸에 익어서 그런지, 최소한 늦음을 피하는 것이 오전 6시다. 적어도 세수하고 옷 입고, 뛰어가서 버스는 탈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본사 출근은 조금 무리가 되는 시간이다.(적어도 6시 15분에 범계로 가야 하니까..) 그러나 아직 후배는 꿈나라 여행이다. 어제 저녁에 7시 반까지 깨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만약 혼자 했던 여행이라면, 서슴없이 자리에 일어나 배낭을 맡기고 바다를 보러 갔거나, 움직였을 것이다.
여전히 그랬듯이, 주말 아침에 늘 그랬듯이, 나는 캐리를 찾아 TV를 켰다. 그녀들은 내가 안산에 있든, 수원에 있든, 그리고 경주에 있든, 여전히 그 시간에 방송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여행지에 온 것이 맞을까 ? 싶을 정도로, 변함없이 내가 봤던 부분이 또 어김없이 방영되고 있었다. 7시 반이 되자마자 후배 엉덩이를 두들기며 잠을 깨웠다. 샤워실이 가득 차서 한참을 기다려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중부에서는 물난리가 났었지만, 여기는 아침 햇살도 따가웠다.
버스 터미널까지 걸어가서 표를 예매하고 식당에 들어갔다. 주무시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화들짝 놀라서 깨시더니, 음식 주문을 받으셨다. 요리하시기 편하시라고 김치찌개 2인분을 시켰는데, 밥은 세공기를 주셨다. 늘 식당에서 반공기만을 섭취하는 나였지만, 그날은 꾸역꾸역 한공기를 다 먹어버렸다. 덕분에 그날 점심은 생략해도 될 정도였다. 다른 손님들보다, 우리를 바라 보시는 눈이 따뜻했던 것은 왜일까? "커피, 저희도 주시면 안되요?"라고 애교섞인 목소리의 후배의 간청에, "당연하지"라고 하면서 듬뿍 커피를 주시던 두분, 오히려 밥을 다 먹고 나오지 못해 너무 미안했던 그분들을 보면서, 맛집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300번을 타야지만, 무열왕릉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버스는 몇십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무열왕릉과 김유신묘는 시내에서 좀 많이 떨어져 있었다. 날이 무덥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혼자였다면, 지도를 따라 걸어갔겠지만, 그날은 그럴 수 없었다. 너무 더워서 어깨가 따가워졌다.
다른 버스를 붙잡고 한참을 어떻게 가는 지 기사 아저씨 설명을 듣던 중 아저씨가 거울을 보시더니, 우리에게 소리치셨다. "뒤에 그 버스 왔어, 빨리 뛰어가서 타~!!"
시원한 버스로는 무열왕릉까지 5분도 안걸렸다. 무열왕릉은 조용했다. 고요했다. 그러나 입장하는 순간, 전형적인 경상도 억양이 들리면서 대가족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우리 방향이 아니어서 그냥 지나치게 되었다. 말벌과 무덤이 많다고 하는 것이 내가 본 무열왕릉의 모습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아까의 그 일행의 단체 사진을 찍어주게 되었다. 사진기는 5개 이상이었던 것 같은데, 서로 자신의 사진기로 찍자고, 그러다, 그 일가족의 어르신인 할아버지의 손에서 하나의 사진기를 건네 받고, 사진을 찍어 드렸다. 사실은 부러웠다. 단체로 가족이 하나의 곳으로 와서 본다는 사실이 말이다.
김유신 묘를 향하려 했으나, 아저씨의 충고로 대릉원으로 옮겼다. 천마총은 대릉원 안에 있었다. 여전히 천마총은 무덤이었고, 우리는 이 무덤이 누구의 무덤이었을 까에 대해 논의를 했다. 관광하는 내내 어깨에서는 불이 나는 듯 했다.
민박집으로 가기 전에 첨성대는 보고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들렀다. 어제는 흐릿했을 때 본 첨성대는 오늘의 첨성대와 달랐다. 여왕의 치마 입은 자태를 따라 만들었다는 이 유물..어떻게 천체 관측을 했다는 것일까? 직접 들어가보지 못하니 알 수가 없었다.
짐을 가지러 민박집에 들렸다.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 빠듯하게 버스터미널을 향했다. 우리는 우산을 놓고 왔음을 알게 되었고, 전화를 걸어 택배로 (물론, 착불) 붙여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나 아주머니, 침착해 보이시던 아주머니 역시 성격이 급하셨는지 자전거를 타고 온다고 하셨다.
버스 시간은 다가왔고, 20분에 출발하는 차는 17분에 떠나려고 했으며, 나는 간신히 그 버스를 붙잡았다. 어쩔 수 없이 아주머니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버스를 타야 했는데, 후배가 버스 아저씨에게 신경질적으로 표를 내버리고 탑승했나보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버스를 탔지만, 화를 내는 버스아저씨와 터미널 담당자를 가라 앉히기는 역부족이었다. 간신히 사과를 대신하여 아저씨들을 진정시키고, 후배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문화의 차이였던 것이다. 주변에 사근한 경상도 분들만 봤던 후배는, 억센 억양의 아저씨의 말투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다리도, 화상 입은 어깨 모두 아팠지만, 그래도 돌아간다는 생각에 다시 편안해졌다. 고생스러운 여행은 아니었지만, 나의 여행관에서 한발짝 물러선 양보를 했다는 점에서 기분이 좋았다. 나의 인내심의 증가와, 양보심의 향상에 박수를 보내며 이 글을 끝낸다.
참고..우리가 머물렀던 민박집 근처는 팔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