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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달려라, 아비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0. 12. 7. 11:08
김애란
p15.
바람이 불면 오랫동안 빨지 않은 녹색 커튼이 펄럭 거려다. 나는 커튼 안에 고개를 파묻으며 깊은 숨을 쉬웠다. 먼지 냄새가 주는 그 오래되고 아늑한 느낌이 좋아서였다. 먼지 냄새는 뭐랄까, 내가 살아본 적 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번은 살았던 것도 같은, 그러나 여전히 모르겠는 세상 말이다.p45.
그리고 무엇보다도 달리기는 강한 지구력을 필요로 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를 떠난 사람이, 나를 떠난 곳에서 오래 달리고 있는 이유를, 그 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다.p95.
나는 입을 열지 않고 중얼거린다. 이것 모두 꿈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오기 위해 북태평양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온 바람처럼, 어쩐지 나는 그 꿈과 꼭 만나야만 할 것 같다고.p107.
내가 나를 먹여 살리게 된 순간부터 나는 내 이력이 지겨워졌고, 내가 제일 그리워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세상의 어떤 무심함, 아주 특별한 종류의 무심함이라 생각하게 되었다.p121.
수면 위로 올라오자마자 물안경을 벗어 던졌다. 말로 울음도 아닌 숨소리가 정신없이 쏟아졌다. 휘파람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온전한 음이 되지 못한 서툰 쇳소리를 목구멍 위로 쏟아냈다.p150
나는 이해받고 싶은 사람, 그러나 당신의 맨 얼굴을 보고는 뒷걸음치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그 사랑이 '나는'으로 시작되는 사람이 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p156.
그녀는 불면의 가장 큰 이유가 자신의 성격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고, 지적인 동시에 겸손하며, 사려깊은 동시에 냉철하고, 일도 잘 하지만 옷도 잘 입는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략)p239.
한번도 휴일이 없었던 그 곳에서 나는 - 나의 필요를 아는 척 해주는 그 곳에서 나는 - 그러므로 누구도 만나지 않고, 누구도 껴안지 않았다. 내가 편의점에 간 사이, 나는 이별을 했고, 내가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 사람인지 깨달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거대한 관대가 하도 낯설어 나는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서성거린다.p246
그는 하루에 두 번 잤다. 낮에는 할 일이 없어 잤고, 밤에는 부모님의 피로와 전기료 때문에 잤다. 꿈은 주로 낮에 꾸었는데, 그에게는 밤보다 낮이 훨씬 불안했기 때문이다.p252.
자신이 아버지의 직업을 부끄러워한 적이 있음을 떠올린 순간 그는 다시 아버지의 직업을 창피해하지 않게 되었다.(★)
소설을 관통하는 것은 아버지와 자식의 이야기. 물론 가끔은 엄마와 자식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읽으면서 공통적인 부분은 부모-자식의 이야기인 것 같다. 읽으면서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도 하고, 현재의 나와 부모님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곱씹게 만들었다.
책을 읽다보면 내가 기억하는 사건들 중 일부를 떠올리게 된다. 유사한 내용의 사건도 있겠지만, 생각의 흐름에 따라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옛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다. 아마도, 아픈 엄마의 현재에는 유년 시절과 다르게 단조로운 일상의 사건이라도 부르기도 어려운 반복적인 형태의 만남과 대화가 이어지기 때문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