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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걷는 하루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0. 10. 22. 22:49
김보미
p9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들이 일전의 나는 너무나 큰 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중략) 다만, 지나고 보니 너무 의연하지 못해서 더욱 바삐 움직였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고 나면 보이는 것들은 가끔 너무 소스라치게 놀라운 것들이 있다.p21
정말 이렇게 힘들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힘들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난 달라졌을까? 글쎄,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까? 몰랐기에 씩씩하게 이 길을 시작했고, 오늘 일정을 정신없이 마무리했는지 모른겠다. 살다보면 아는 게 힘이 될 때도 있지만, 오힐 모르는게 약이 될 때도 있다.p29
과열된 공정성의 논란은 공정성을 적용해야 하는 범주와 기준에 대한 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중략) 공정함은 과정에 적용되는 것인데, 공정한 과정이 평등한 기회와 균등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음에도, 어떤 때는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p47
코 끝에 신선한 공기가 닿을 때, 조용한 길 위에서 나의 등산화가 바닥에 닿는 소리, 아침이면 늘 더 무겁게 느껴지는 배낭으로 조금은 거칠어지는 숨소리, 어둠 속에서 아주 작은 반경 안으로 나의 움직임과 소리가 채워지면, 오롯이 나를 생각하게 된다. 어느새 하루 중 애정하는 시간이 되어버린 것 같다.p112
걷는 방법이 다르고 걷는 의미가 각자 다 다른 것인데, 일반적이지 않다고 혹은 나와 다르다고 해서 유별난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나의 속도로 내 몸에 맞게 각자 걸어가고 있는데, 이 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조금은 타인에게 무신경할 필요가 있다.
(★)
30대 초반에 부엔 까미노, 순례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그래서 정말 여행 책자도 여러번 들여다 보고, 여행 에세이도 많이 읽었다. 그런데 못가는 마음의 나쁜 심보였는지, 여행자들의 책이 그닥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길을 떠난 이유도 나와 다르고, 상대적으로 금전적이나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보이는 것 때문인지, 혹은 길에서 만난 외국 친구들하고의 이야기와 인증샷 같은 느낌의 사진 때문이었는지, 그저 나 여기 다녀왔다 하는 자랑으로 보여졌다. 어디 책 뿐인가. 다큐나 개인 영상 등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공감이 잘 되지 않았다. 그저 타인들이 하는 좋은 여행기일 뿐, 내가 걸어야 할 이유나 걸으면서 잃거나 얻게 되는 그 무언가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례자의 길과 관련된 책을 다시 읽었다. 사실, 그래서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사진이 없다는 점과 그리고 개인의 일기와 인생에 대한 고민이 돋보여서 선뜻 집어들 수 있었다. 저자가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도 심히 공감이 되었고, 걸으면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들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다시 걸어보고 싶은 생각을 했다. 비록, 나중에... 라고 늘 지키다고 보장하기 어려운 조건이 붙었지만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앞서 말한 내가 느꼈던 다른 책에 대한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떠한가. 책이란 기호식품과 마찬가지일 것이고, 나랑 맞는 책을 만났을 때의 기쁨은 책을 읽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