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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가난한 사람들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5. 5. 15. 10:00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 열린책들 / 석영중 옮김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 대신 부끄러움에 손발이 오그라들고, 낯이 뜨거워진 경우는 처음인 것 같다. 독자인 내가 봐도 자격지심이 대놓고 느껴지는지... 정말 여자주인공에게 "도망가!"라고 외치면서 보다보니, 어쩌면 남자주인공의 모습이 현대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를바 없지 않을까? 그리고 사람 사이에는 뛰어 넘을 수 없는 강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개인 생각 및 의견
p13.
아아,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될까요, 제 운명은 대체 어떻게 전개될까요? 불확실한 내일과 보장 없는 미래, 그리고 앞으로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도 할 수 없는 현실만 생각하면 전 괴롭기만 합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조차 무서워요. 잠깐만 회상을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으니까요. 저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사악한 사람들 때문에 저는 앞으로도 수많은 세월을 울고 또 울어야겠지요.p48.
추억은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항상 괴로운 것이다. 최소한 나한테는 그렇다. 그러나 그 괴로움은 또 달착지근한 것이다. 마치 타는 듯한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면 이슬이 폭염에 바싹 마른 꽃에 신선함을 주어 소생시키듯이, 추억은 괴롭고 아프고 지치고 슬픈 내 가슴에 새로운 힘을 주어 소생시키는 것이다.(★) 문학 관련 모임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마까르. 나는 처음부터 두서없는 이 남자의 편지에서 자격지심이 느껴지고, 가난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중간에 급발진하는 것은 뭔가 싶기도 하다...
p111.
바렌까, 솔직히 말해서 저는 지금 더 이상 가난할래야 가난할 수도 없을 만큼 가난합니다. 이전엔 단 한 번도 이 정도로까지 상황이 악화된 적은 없었습니다.p126.
당신을 알고 나서 저는 우선 저 자신도 잘 알게 되었고,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그런데 지금은 제가 운명에 내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운명에 치이다 보니 제가 가지고 있던 장점도 스스로 부인하게 되고, 거듭되는 불행에 의기소침해져서 그만 맥이 풀렸습니다.p126.
요즘 저는 혼자서 오래도록 슬픔과 그리움에 빠져 있을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땐 기분이 아주 좋아요. (중략) 하지만 그렇게 옛일을 회상한 뒤에도 괴로운 것은 여전합니다. 저는 점점 더 약해지고 있습니다. 공상을 하고 나면 저는 기진맥진해집니다.p170.
이제 제게도 좋은 문장력이 생겨나고 있는데...... 아, 소중한 이여, 문장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저는 지금 무슨 말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쓴 것을 다시 읽어 보지도 않습니다. 문장을 고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뭔가를 쓰기 위해 저는 이러고 있습니다. 당신께 조금이라도 더 많은 얘길 쓰려고요...... 사랑하는 이여, 소중하고 소중한 내 사람이여!역사 해서. 문학적 빈곤에 관한 짦막한 고찰 / 석영중
p173.
그는 상투적인 하급관리 이야기를 가난에 관한 심리적 분석으로, 낡아빠진 서한체 연애 소설을 문학에 관한 진지한 담론으로 변형시킨 진정한 천재성을 이미 이때부터 보여 주었던 것이다.p174.
한편 제부쉬낀의 빈곤은 심리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문학적 차원으로까지 올라간다. 특히 그의 문학적 빈곤과 바르바라의 문학적 풍요(상대적인 것이겠지만)는 음산한 대조를 이루며 두 사람의 애정 관계가 이미 예정된 비극임을 시사한다.p175.
즉 그는 문학이 현실의 반영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싸구려 연애 소설의 궁핍한 공간에 숨어 버림으로써 이중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p176.
그러니까 두 사람의 문체론적 차이는 감정의 차이와 나란히 양자의 비극적인 결별을 예고해주는 셈이다. 제부쉬낀을 배우자로 선택하지 않는 것은 나이나 물리적인 빈곤 못잖게 제부쉬낀을 비참하게 만들어 주는 문학적 빈곤 떄문인 것이다.p177.
한 인간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그가 읽는 책, 그가 쓰는 글이라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미학 공식은 이미 첫번째 소설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