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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1. 어린이라는 세계
    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9. 19. 10:00

    김소영

     

    1부. 곁에 있는 어린이

    시간이 걸릴 뿐이에요

    어른은 빨리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기다려주는 순간에는 작은 보람이나 기쁨도 있다. 그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와 어른은 함께 자랄 수 있다.

     

    선생님은 공이 무서우세요

    어린이는 허세를 부리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어린이의 '부풀리기'는 하나의 선언이다.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

     

    착한 어린이

    '착한 어린이'라는 말에는 '남의 평가'가 들어가게 마련이다. 이때 '남'은 주로 어른들이다. 
    어린이는 착하다. 착한 마음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어른인 내가 할 일은 '착한 어린이'가 마음 놓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어린이의 품위

    내 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을 한다. (중략)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나는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무서운 일

    어린이들은 무서워하는 게 많다.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하고, 무서운 것을 마주하면서 용기를 키우고, 무서운 것을 이겨 내면서 새로운 자신이 된다는 것을. 그런 식의 성장은 우리가 어른이 된 뒤에도 계속 된다.
    하지만 모든 무서운 일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놀이 아니고 놀기

    무엇보다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고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고 자기가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노는 그 순간이 어린이의 현재를 빛나게 한다. '놀기'에는 아주 큰 소득이 있다.

     

    읽고 쓴다는 것

    '이 책 앤' 자람이의 마음이 담겨 있다. 나도 마음을 담아 읽을 것이다. 그러니 똑같이 보여도 다 다른 책이다.

     

    제가 어렸을 때는요

    "제가 5학년 담임인데요. 사실 이 녀석들 5학년이면 학교생활도 알 만큼 알고 웬만한 건 알아서 해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곤 하거든요. 그런데 열 두 살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이고 알면 얼마나 알겠냐, 어린이는 어린이구나 싶네요."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나는 '개성'이라고 하면 유별난 점, 뚜렷이 드러나는 특징, 남들과 확실히 구분되는 독보적인 무언가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면서도 장점이나 장점으로 봐 줄만한 무언가여야 개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이 없으면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들 덕분에 개성이란 '고유성'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린이의 개성은 그보다 복잡하게 만들어진다. 어린이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과 스스로 구한 것, 타고난 것과 나중에 얻은 것, 인식했거나 모르고 지나간 경험이 뒤섞인 존재다. 어른이 그렇듯.
    사람들이 각자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주는 활기차다. 서로 달라서 생기는 들쭉날쭉함이야 말로 사무저긍로 보일 만큼 안정적인 질서다. 그런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게 나는 안심이 된다. 우주가 우리 모두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넓다는 사실도.

     

    2부. 어린이와 나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어떤 어린이는 여전히 TV로 세상을 배운다. 주로 외로운 어린이가 그럴 것이다.

     

    한 지붕 아래 사는 친구

    자매, 형제의 정이란 참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쌓이는 모양이다. 싫어하면서도 껴안고, 껴안으면 웃음이 나고, 그렇다고 다 풀리는 건 아니고. 그래서 늘 할 말이 남아 있는 사이.

     

    마음 속의 선생님

    선생님은 어린이들이 가장 일상적으로 만나는 전문가이고, 때로는 유일하게 만나는 지식인이다.

     

    어린이의 편식, 어른의 편식

    어릴 때와 달리, 누구와 무엇을 먹을지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게 먹는 즐거움의 영역을 많이 넓혀준 듯 하다.

     

    선배님 말씀

    그냥 기분 전환으로 배운다고 생각하시면 늘지도 않고 재미도 없어요. '정말 열심히 하겠다!' 결심을 하셔야 해요.
    열심히 하세요. 안 됐는데 갑자기 될 때가 있어요.

     

    위로가 됐어요 

    그만큼 멋있는 어른이 되려면 친절을 베풀고 잊어버려야 하는데 나는 그럴 자신은 없다. 나는 속이 좁아서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사랑이라고 해도 될까

    어린이는 이성으로 가르친다! 이것이 나 자신의 사훈이다. (중략) 직업 윤리와 진실한 자세만 있다면, 굳이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고도 성과가 있다고 믿는다.
    물론 나도 약간의 욕심이 있다. 사랑을 주고 받기에는 내 자리가 적절치 않지만, 우정은 나누고 싶다.
    내가 사훈이니 뭐니 하며 재는 동안에 사랑은 이미 흐르고 있었다. 어린이로부터 내 쪽으로. 더 많은 쪽에서 필요한 쪽으로.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내 마음에 사랑이 고여 있을 리가 없다. 모두 너무 보고 싶다.

     

    삶을 선택한다는 것

    사람들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말하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죽음보다 삶이 더 많은 용기를 요구했다.
    가해자가 성장과정에서 겪은 일을 범행을 정당화하는데 소비하는 것은 학대 피해 생존자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학대 대물림'은 범죄자의 변명에 확성기를 대주는 낡은 프레임이다. 힘껏 새로운 삶을 꾸려가는 피해자들을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예비 범죄자'로 보게 하는 나쁜 언어다.

     

    양말 찾아 가세요

    (★) 아끼면 잃어 버릴까 갖고 있기 보다 더 자랑하고 만지고 싶다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

     

    남의 집 어른

    친구는 엄마가 되어 어떤 삶의 순환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그 바깥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방향과 속도가 다른 자리에 나와 친구가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를 키우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것까지가 양육이 아닐까 하고. 기쁘고 보람있는 일이겠지만 아마 그만큼 무겁지 않을까 그것 역시 짐작만 해본다.

     

    3부. 세상 속의 어린이

    저 오늘 생일이다요?

    존댓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서열을 파악하고 어휘를 고르고 감정을 조절하는 일이다.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써 보면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어른스럽게 들리는지 알게 된다. 의외로 반말을 쓸 때보다 대화의 분위기도 훨씬 부드러워진다. 어린이를 존중한다는 의지가 명확히 표현되는 순간, 어른의 여유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진짜 권위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서로 존댓말을 쓰는 사회적인 대화를 어린이도 사양하지 않는다. 존댓말을 들은 어린이는 살짝 긴장하면서도 더욱 예의 바르게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마치 그런 대화가 몸에 밴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것 같다.

     

    한 명은 작아도 한 명

    어린이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그 사실을 깜빡한는 것 같다.
    날마다 조금씩, 거의 느껴지지 않는 속도로 자라면서 어른들 중심의 세상에 적응해 았을 것이다. 덕분에 멀미를 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어린 시절에 얼마나 불편했는지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어린이에게는 성장할 공간이 필요하다.

     

    쉬운 문제

    (★) 시끄러운 아이와 부모 > 노키즈존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은 "차별"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상황에서 피해를 보는 다수를 위한 방법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생긴다. 노키즈존은 내 생각에는 아이를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몰상식한 부모를 거르고 싶어하는 가게주와 손님의 마음이라고 말이다.

    우리나라 출생률이 곤두박질친다고 뉴스에서는 '다급히' 외치고 있다. 그런데 어린이를 환영하지 않는 곳에 어린이가 찾아올까? 너무 쉬운 문제다.

     

    어린이가 '있다'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된다. 옳은 말을 찾아야 한다.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 먹는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면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오해

    어린이는 자라면서 세상에 대한 크고 작은 오해들을 풀어간다.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다. 어른이 어린이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사랑을 표현할 때, 오히려 사랑은 칼이 되어 어린이를 해치고 방패가 되어 어른을 합리화 한다.
    세상에는 어린이를 울리는 어른과 어린이를 웃게 하는 어른이 있다. 어느 쪽이 좋은 어른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어린이는 정치적인 존재

    어린이는 정치적인 존재다. 어린이와 정치를 연결하는 게 불편하다면, 아마 정치가 어린이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 보기에도 민망하고 화가 나는 장면들을 어린이들에게 보이기 싫은 것이다. 그런 문제일수록 어린이에게 설명하기도 어렵다.

     

    내가 바라는 어린이날

    나는 어린이날이 어린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날에 그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어린이가 '해방된 존재'가 맞는지 점검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길잡이

    어린 시절은 어린이 자신보다 어른에 의해 만들어지는 부분이 많은 구간이다.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수정할 수도, 지어낼 수도, 마음대로 잊을 수도 없다. 어린 시절의 어떤 부분은 어른이 되고서도 한참 뒤에야 그 의미를 알게 된다. 시차는 추억을 더 애틋하게 만들고 상처를 더 치명적인 것으로 만든다.
    나는 이제 어린이에게 하는 말을 나에게도 해 준다. 반대로 어린이에게 하지 않을 말은 스스로에게도 하지 않는다.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래야 나의 말에 조금이라도 힘이 생길 것 같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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