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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비가 와도 꽃은 피듯이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0. 11. 19. 11:32
노신화
아빠와의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다. 살가운 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둘 사이에 마음의 거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바쁜 일상이 갈라 놓은 적당한 거리쯤이라고 할까.
생각해보면 아빠의 치매는 외로움에서 비롯된 것 같다. 퇴직 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아빠는 늘 혼자였다. 일터로 나갔다 돌아온 가족 중 누구 하나 먼저 다가가 말벗이 되어 주지 않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진 것이 아빠에게 낯설었던 탓일까.
부모는 자식이 바보이길 바라는 때가 있다. 자신의 아픔을 자식이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길 바란다. 당신 때문에 걱정하는 자식을 보는 것이 더 큰 괴로움이니까. 그래서 자식은 뻔히 보이는 부모의 거짓말에도 모른척 눈감아줘야만 한다. 가슴이 아프더라도 말이다. 오늘 아빠와 나는 서로를 속고 속였다. 하지만 속상하거나 화날 일은 없었다. 그게 사랑이니까.
아빠는 그렇게 해마다 자신들의 건강을 기원했지만 정작 당신의 건강을 챙기지 못했다. 몸 속에 암 덩어리가 자라고 있던 그 날도 여전히 자식들을 위한 소원을 빌며 촛불을 껐다. 만약 아빠의 생일을 축한하는 순간이 다시 온다면, 촛불을 끄기 전에 꼭 말해주고 싶다. 이제는 우리 말고 아빠의 건강을 기원하는 소원을 꼭 빌어 달라고.
아빠는 당신만의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해 왔다. 어쩌면 치매는 아빠가 아니라 나에게 있었던 게 아닐까? 이 귀한 사랑을 오래 잊고 살아 왔으니 말이다.
'사람은 호흡이 멈춰도 귀로 소리를 들을 수 있대'
심장을 조이는 사이렌 소리, 가슴을 후비는 아내와 자식의 울음 소리를 아빠가 듣고 있다! 가까스로 울음을 삼킨 뒤 엄마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아빠가 우리 목소리 다 듣고 있어. 빨리 좋은 얘기만 해드리자!"
(중략)
"여보... 여보... 고마워. 고마웠어. 고마웠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감사의 말이었다. 며칠 전, 아빠가 그랬듯 엄마도 처음으로 남편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40여년을 함께한 부부의 마지막 인사... 그것은 고맙다는 한마디 말로 충분했다.아빠는 평온한 얼굴로 가족의 마지막 인사를 들어 주었다. 그 얼굴 위로 관 뚜껑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졌다. 심상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아빠를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미처 못한 말들이 너무나 많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간신히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중략)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다. 단 한번 만이라도, 딱 1초 만이라도.
(★)
엄마가 아프니, 이런 이야기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엄마를 위해서 아빠와 언니, 그리고 나는 씩씩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혼자 있을 때에는 주체할 수 없는 것이 눈물이다. 서러워졌다. 조용히 살던 엄마에게 이런 일이 왜 생겼는지... 엄마가 우리 곁에 없는 것을 아직 상상해서는 안된다. 희망의 끈을 놓치 말아야 한다. 하지만, 차가운 현실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건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