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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전업주부입니다만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0. 11. 9. 23:34
라문숙
p15
집안일은 끝이 없다. 종류도 많고 시간도 품도 많이 든다. 매일 하는 일이지만 건너뛰기가 안되는 일들이다. 큰맘 먹고 손을 놓으면 그 다음날에 정확히 두 배의 일거리로 되돌아온다. (중략) 해도해도 끝이 나지 않지만 손을 놓으면 당장 표가 나는 기이한 일이다.p20
보송하게 마른 옷과 수건을 탁탁 털어서 반듯하게 접어 놓으면 흐트러진 일상이 조금은 단정해진 느낌이 들어 만족스럽다.p35
끝없는 정리의 압박감 뒤에 숨은 건 복잡하고 어수선한 집안이 아니라 꼬이고 뒤틀린 인생이라는 사실에 무방비로 내던져진다. 물건만 정리하면 내 삶도 시원스럽게 정리될 것 같다는 생각은 물론 착각일 것이다. 어수선한 집을 말끔하게 정리하려고 애쓰는 사이에 정작 어질러진 내 인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잊혀가고 있음을 알았다.p45
집안일만 없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안일만 안해도 된다면 공부도 할 수 있겠고 긴 여행도 모험도 글쓰기도 근사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하고 싶은 일, 도전하고 싶은 일들에 다가가기 전에는 뜸을 들이며 여전히 집안일에 머문다.p64-65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하고 우울했던 감정들이 단어가 되어 소리를 입는 순간 정체를 드러낸다. 그립고 서럽고 분통이 터지며 웃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p66-67
정말 뭘 해야할 지 모르겠는 날에 남편에게 뭐가 먹고 싶으냐고, 어떤 음식이 맛있느냐고 물어본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다. 내가 해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는 것이다. 답답하기 그지없다.
언젠가 입맛이 없는 동생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남이 만들어주는 음식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남편과 동생이 좋아하는 음식은 같은 거네 싶었다. 남이 해주는 음식. 실은 저도 그렇거든요!p82
내 앞에 누가 있어서 그를 따라가기만 하면 좋겠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거나 힘들어서 주저 앉으면 소리쳐 불러주고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p109
행복해지는 건 쉽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거나 혹은 아주 조금만 기대하거나.p89
내가 움직인 딱 그만큼 함께 움직인 책. 언제나 마지막 장을 덮으면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일을 하다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집안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뭔가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소득에 잡히지 않는 노동력) 조금 침울해지기도 한다. 몇몇의 사람은 남편 덕에 집에서 논다고 부러워하기도 했는데, 그런 말들이 오히려 불쾌감을 돋울 뿐이었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면 집에 있는 엄마는 아주 많이 바빴다. 간혹 짬이 나면 피곤해서 잠시 기대어 눈을 감을 뿐. 그래서 나는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노동은 노동에 비해서 인정받지 못한 것 같아서.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중간 중간 공감이 너무 많이 되었다. 그리고 나도 이 책을 덮으면서 내가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