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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아침의 피아노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0. 8. 18. 07:27
김진영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선생님은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병상에 앉아 메모장에 <아침의 피아노>의 글들을 쓰셨다.
13.
분노와 절망은 거꾸로 잡은 칼이다.
그것은 나를 상처 낼 뿐이다.52.
내가 상상하지 않았던 삶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것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64.
한 철을 살면서도 풀들은 이토록 성실하고 완벽하게 삶을 산다.76.
어제 누군가가 말했다.
"제가 힘들어하면 선생님은 늘 말하고 하셨어요. 그냥 놔둬, 놔두고 하던 일 해...... 그 말씀을 돌려드리고 싶네요."81.
한동안 눈뜨면 하루가 아득했다. 텅 빈 시간의 안개가 눈 앞을 가리고 그 안개의 하루를 건너갈 일이 막막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침에 눈떠서 문득 중얼거린다. "안개를 통과하는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그건 일상이다. 일상을 지켜야 한다. 일상이 길이다."109.
좋은 것들과 사랑들이 내게는 너무 많다. 그걸 잊지 말 것, 늘 기억하고 자랑스러워할 것, 그리고 환대하고 응답할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일이며 모든 일이다.117.
어제를 돌아보면 후회가 있고 내일을 바라보면 불확실하다. 그 사이에 지금 여기의 시간이 있다. 몹시 아픈 곳도 없고 깊이 맺힌 근심도 업다. 짧지만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시간 - 이 사이의 시간들은 내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는 일 없이 또한 존재할 것이다. 끝없이 도래하고 머물고 지나가고 또 다가올 것이다. 이것이 생의 진실이고 아름다움이다.122.
나는 나를 꼭 안아준다.
괜찮아, 괜찮아......131.
불안이 심해진다. 자꾸 놀라고 쓸데없는 일들에 생각을 빼앗긴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이 낙담스럽다. 그래도 결국 지나갈 거라는 걸 안다. 조용한 날들이 돌아올 거라는 걸 안다.139.
내가 저지르고 그래서 나를 괴롭히는 패배들에는 근거가 없다. 다만 어리석음의 소치일 뿐.192.
자유란 무엇인가.
그건 몸과 함께 조용히 머무는 행복이다.211.
몸무게를 달아본다.
자꾸 마른다.
자꾸 가벼워진다.
나중에 나는 날아오르게 될까.233.
적요한 상태.(★) 적요 : 적적하고 고요함
234.
내 마음은 편안하다.(★)
엄마가 아프고 난 뒤,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멀쩡하게 살아가다가도 불의의 사고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을 것이고, 암과 같이 죽음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하루하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정으로 보낼 수 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너무나 먹먹하고, 담담한 작가의 글 속에서 읽는 사람의 슬픔은 극대화 되는 것 같았다. 요즘은 무언가를 상실하는 기분은 정말 느끼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