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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8. 소설보다 여름 2021
    개인 도서관/도서관1 2024. 5. 31. 00:36

    서이제, #바보상자스타

    p12.
    나는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기 전에 나 자신을 걱정해야 했다. 그러니까 나에게 곧 다가올 미래를. 설날에 고향집에 가지 않는 방법을. 자고로 가족이란 멀리 떨어져 지낼 때 더 가까워지는 거라고 나는 믿고 있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그들과 멀리멀리 떨어져, 잘 지내고 싶었다.
    p18.
    실패도 다 경험이라고 하지만, 차라리 실패하는 게 낫다고 하지만, 그런 말들은 모두 실패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실패는 성공의 아버지라고? 성공의 아버지는 커녕, 실패는 아버지의 노여움만 샀다.
    p44.
    모두가 찾는 재호는 고향에 오지 않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나는 매년 고향에 있었다.
    p71.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p77.
    나는 텔레비전 화면 앞에서 우주 어디쯤 이름도 없이 떠돌고 있을, 먼지와도 같이 작은 천체들을 상상하며,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크나큰 우주를 아득히 그려보았다. 멀리, 아주 멀리. 살아생전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이르고 싶었다. 나도 한 번쯤은, 그곳에.

    인터뷰

    p81.
    소유할 수 있는 건 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주고 받는 방식, 그러니까 언어를 운용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고유한 말하기 방식을 가지고 있고, 말하는 방식은 그 사람의 사유의 방식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생각을 전환하고 싶을 때는 말하는 방식부터 바꾸려고 노력하고요. 저는 말을 '위치와 배열과 관계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p84.
    최근에는 소설의 문장을 읽어 내려갈 때의 시각적인 리듬과 속도에 신경을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공백 또한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포함하고 있고요. 꼼꼼하게 독해해야만 하는 텍스트와 직관적으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를 자연스럽게 교차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미지를 구성할 때처럼, 문자를 배치의 영역에서 생각해보려고 하고요. 그래서 기호도 적극적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하고요. 읽기와 보기 사이에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길 바라는 거죠.
    p88.
    지난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여전히 저에게 '희망'은 밝은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계속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중요한 건,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지키며 살 수 있느냐의 문제겠죠. 그리고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거요.
    p92.
    소설을 쓰기 시작한 후로, 계획대로 되지 않아 더 나아지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모든 계획을 철저하게 지키는 건, 오히려 상황이 더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는 일인 것 같고요.

     

    이서수, 미조의 시대

    p118.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우리는 말이 없었다. 엄마는 지친 듯 눈을 내리 깔았고 나는 그제야 엄마의 속눈썹에 맺힌 감정을 보았다. 우리는 가난해도 너무 가난했다. 하지만 둘 다 그걸 인정할 수 없었는데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우리가 함께 살 집을 구하기에 턱 없이 부족한 5천만원은 아버지가 평생 동안 모은 재산이었다. 우리는 그걸 너무나 잘 알았기에 절대로 기죽지 않겠다고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울의 집값은 아버지의 유산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어느새 아버지는 여섯평 남짓한 반지하 방의 전세금만 남겨준 사람이 되어 있었다.
    p121.
    종이에 앉은 단어도 이렇듯 제자리가 ㅇㅆ는데 우리는 왜 아무 곳에도 앉지 못할까.
    p124.
    나는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집에 가서 가만히 누워 있어봐. 그러는 동안에도 마음이 계속 편하면 그 사람과 마음 놓고 친해질 준비를 해.

    인터뷰

    p138.
    저는 평소에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아마도 제가 시대를 잘 따라잡지 못하고 시대와 불화하면서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p145.
    저는 공간이 인간을 어느 정도 조형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스무번 넘게 이사를 다녔는데, 어떤 공간에 살고 있는지에 따라서 저의 생각이나 색채 같은 것이 변했던 것 같습니다.

     

    한정현, 쿄코와 쿄지

    p186. 
    처음 체류 신고를 하던 날 버벅대던 나를 도와 서류를 받아 적던 직원이 경자? 하더니 서울 京, 아들 子로 내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그가 확인을 위해 나를 한번 올려 보았지만, 나는 그것을 빤히 보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 子가 아닌 스스로 自. 스스로의 공동체는 그 뜻이었는데 말이에요. 혜자, 미자, 그리고 영자...... 나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京, 子, 쿄코가 되었습니다. 쿄코로 사는 것, 아무 문제도 없는 것만 같았지요.
    p188.
    눈물도 그런 것 같아요. 눈물이 흐르면 처음엔 앞이 흐리지만 나중엔 오히려 시야가 맑아지죠.

    인터뷰

    * <그들의 518>, 노영기, 푸른역사, 2020

    p210.
    항상 고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져야 한다, 는 신념이 항상 선이 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p211.
    존중받아야 할 타인의 삶, 이라는 자각을 붙들고 있으려 합니다. 그 어떤 삶도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
    이 얇은 책에 들어 있는 소설들은 읽다보면 현실의 누군가의 산문으로 읽혀진다. 그리고 마지막 작가의 인터뷰. 그 어떤 삶도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 존경한다.

타인의 시선으로... Omniscient POV